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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워 과탄산소다

by 이유

이사를 하고 나서 취미가 하나 생겼다.

그것은 바로 빨래다. 과탄산소다의 발견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작은 집으로 이사하는 터라 살림살이를 최소화하느라 버리는 것이 많았는데, 언젠가 사두고 욕실에 오도카니 모셔만 두었던 과탄산소다가 이삿짐 박스에서 빼꼼히 나온 것이었다.


이삿짐을 푸는 일은 내 물건들의 재발견이기도 했다.

아, 이 색깔 티셔츠가 있었지. 투명박스테이프가 여기 있었구나, 그렇게 찾았는데. 그리고 여기저기 더 이상 들고 다니지 않았던 에코백에 숨어있던 나의 립밤들. 피지오겔 작은 샘플은 왜 그렇게 많은지. 그 물건들의 색감과 감촉, 냄새는 내 손을 잡고 시공간을 넘나들었다. 그다지 사용하지 않아 추억이 없는 물건들은 이제 나와 새로운 이야기를 써나갈 테다. 만나서 반가워, 과탄산소다.


정말 시작은 아침에 일어나서 습관처럼 핸드폰으로 즐겨보는 앱을 확인하던 중 과탄산소다 사용법이라는 글을 본,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전에 살던 집은 지은 지 오래된 집이었는데 전기가 자주 말썽이었다. 이사를 떠나기 몇 달 전은 가지고 있는 간접조명에 의지해 살다시피 했다. 지금 집은 작지만 빛이 매우 잘 든다. 전기도 아직까지 말썽이 없다. 그렇다 보니 그 전엔 잘 보이지 않았던 옷의 희미한 얼룩들이 눈에 잘 띄기 시작했다. 나는 옷에 뭘 잘 묻히고 다니는 타입이었던 것이다! 얼룩이 묻은 위치도 상체 가슴이나 배 부위로, 모두 비슷비슷했다.


주말 아침 팔을 걷어붙이고 고무장갑을 꼈다. 대야에 따듯한 물을 넉넉히 담고 과탄산소다와 주방세제를 넣어 잘 녹여주었다. 그리고 빨래 투척. 얼룩이 있는 부분은 조금 더 성의 있게 문질러 주었다. 10분 정도 담갔을까? (사용법에서 너무 오래 담그는 건 좋지 않다고 했다.) 누르스름한 구정물이 빨래에서 빠져나왔고, 살짝 쿰쿰한 냄새가 났다. 거품이 더 이상 나지 않을 때까지 헹궜다니,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정말 얼룩도 빠지고 빨래가 샤랄랄라 하얗진 것이다. 땟물이 쪽 빠진 느낌이라고나 할까.


이럴 수가 있구나. 나는 "빨래 끝!" 하고 번쩍번쩍 빛이 나는 하얀 셔츠를 한 무더기 널면서 마무리하는 세제 광고는 신화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빨래에서 광선이 나오지는 않지만 얼룩이 빠지긴 빠지는 것이었다. 나는 과탄산소다의 작은 기적에 감격하여 그동안 포기했던 얼룩들을 하나씩 하나씩 지워나가기 시작했다.

되는구나, 돼. 되는 일이 있구나.


친구에게 선물 받은 패브릭 테이블 매트를 찾았다.

언젠가 면접 준비하느라 사두었던 얌전한 하얀 셔츠를 찾았다.

취직되고 남색 유니폼과 맞춰 입으려고 고심하며 고른 여린 살구빛 블라우스도 찾았다.


모두 과탄산소다와 주방세제를 녹인 물에, 퐁당. 나는 장갑을 끼고 조물락조물락. 묵은 때가 짙은 땟물이 되어 빠지고 하이얀 거품이 뭉게뭉게 일었다.


주말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 빨래를 했다. 햇살이 작은방에 잔뜩 들어왔다. 말끔해진 빨래가 창문에 매달려 까딱까딱 춤을 췄다. 바람이 부추겼다. 좀 더 흔들어봐. 어깨를 흔들어. 그렇지 그렇지. 나는 하얀 가능성이 햇볕에 익어가는 것을 보며 콧노래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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