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가 없는 곳 길리 트라왕안
아침 일찍 환전을 하고, 숙소 호스트의 도움을 얻어 우리는 바로 길리로 들어가는 배를 타기 위해 항구로 갔다. 길리 섬들은 외국에서 한국식당을 여는 예능프로그램의 원조격인 윤식당으로 유명세를 탄 곳이다. 그 방송이 없었더라도, 인도네시아를 여행하기 위해 정보를 모으다 이 섬을 찾았을 것 같다. 차가 안 다니고 말이 교통수단인 섬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하하를 데리고 갈 이유는 충분했다.
이번 여행에서 교통수단으로 배는 처음이었다. 계획대로 롬복에서 탔다면 15분이면 됐을 텐데 발리 빠당바이에서 길리 섬까지는 한 시간 반이 걸렸다. 배가 섬에 도착하고 육지에 발을 딛자마자 하하는 흙장난을 시작했다. 자동차나 오토바이가 보이지 않고, 자전거와 마차, 그리고 우리처럼 큰 배낭을 멘 여행객들이 가득한 곳. 하하는 이곳이 너무 좋다고 했다.
숙소에서 자전거를 한 대 빌렸다. 아이를 앉힐 안장 설치를 부탁하자 숙소 주인이 친절하게 안장을 찾아와 뚝딱뚝딱 고정해 주었다. 여행 중 처음으로 하하를 숙소에 혼자 두고 자전거로 주변 탐색에 나섰다. 구글지도 속에만 존재하던 주변 지리가 대충 머릿속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이제 하하를 태우고 나와도 되겠다.
과일을 사가지고 숙소로 되돌아갔을 때 하하가 보이지 않았지만, 싱가포르 때처럼 놀라지는 않았다. 주변 어딘가에서 놀고 있을 것 같았고, 실제로 그랬다. 우리나라 부침개 같은 비주얼의 현지 핸드메이드 간식을 얻어먹으며 아이들과 잘 놀고 있더라.
모든 사람들이 이 아이에게 친절했고, 어디서건 거침없이 피워대는 여행객들의 담배연기 말고는 이곳에서 하하에게 해가 될 것은 없어 보였다.
하하는 이 여행에서 돌아와서 계속 자연친화적이고 흙장난과 곤충을 좋아하는 아이로 자랐다. 여행을 다녀온 그 해 어느 날, 변기에 앉아 볼일을 볼 때마다 옆에 있는 변기솔을 자꾸 만지는 하하에게 무서운 표정으로 얘기했다.
"거기 눈에는 안 보이지만 아주아주 작은 벌레들이 잔뜩 있어."
하하는 잠시 인상을 찡그리며 바라보다가 말한다.
"벌레들아 안녕? 난 하하야."
서울에서 태어나 계속 자랐지만, 어릴 적의 경험들이 아이 시선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길리 트리왕안은 작은 섬이다. 자전거를 타고 아들과 해안가를 따라 섬을 일주했다.
앞에 앉은 아들에게, 이제 돌아가면 엄마는 회사에 나가야 하고 너는 어린이집에서 매일매일 길고 긴 하루를 보내야 한다, 너도 엄마도 힘들겠지만 잘해보자, 이 여행이 너도 엄마도 성장하게 해 줬을 거야, 이렇게 내내 아이에게는 암호 같았을 말들을 속삭였다.
하늘에 주황빛이 돌 즈음 출발해서 한 바퀴를 도니 어두워져 있었다. 아이는 내 앞자리에 앉아 지나며 보는 모든 것들에 감탄하며 예쁘다, 멋지다,를 연발했다. 지나온 길이 우리를 성장하게 해 줬기를. 이후 우리가 개척하며 걸어야 할 길 앞에 놓인 모든 역경들에 담대해질 만큼의 지혜와 힘을 기르는 시간이었기를.
섬에서의 마지막 날 바닷가에서 아이 머리 위로 길게 무지개가 뜬 것을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