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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estas Aug 31. 2023

가족이란 건 어떤 의미일까?

42일간의 배낭여행 6. 셀추크-마르마리스

아침 일찍 움직여서 셀추크로 왔다. 데니즐리 터미널 근처에 기차역이 있었고 셀추크 터미널 근처에도 있었으니 버스 말고 한 번은 터키 기차를 타볼걸 그랬다. 데니즐리에 도착해서 버스표부터 끊어 놓고 찬찬히 지도를 보다가 그 생각을 했으니 이미 늦었다. 여행지에 가면 현지 교통수단을 최대한 다양하게 경험해보려고 하는데, 이제 여기서 2박을 하고 그리스 넘어기가 위한 항구도시 마르마리스로 가면 끝이니 튀르키예에서는 2주간 있으며 기차는 못 타보게 되겠다.


셀추크 숙소는 지금까지 묵은 곳 중 가장 실망스러웠다. 냉장고도 없고 공용시설은 사실상 없는 셈. 2층 주방에 있는 냉장고를 사용해도 된다고 해서 물도 얼리고 과일도 넣어두고 했는데, 갈 때마다 눈치를 받는 느낌이었다. 2박 90유로라서 그리 싼 숙소도 아닌데 잘못 고른 거 같다. 이때부터 출발 전 무료취소로 예약해 놓은 숙소들을 기한안에 순차적으로 다 취소하기 시작했다. 극성수기 유럽여행이라는 생각에 일단 미리 안전장치를 마련해 놓은 것인데, 막상 다녀보니 그러지 않았어도 되는 분위기였다. 마르마리스 숙소는 우리나라 예약사이트에서 검색 안 되는 곳을 구글 지도를 보고 찾았는데 만족스러웠다.


하하는 오늘은 좀 쉬고 싶어 했다. 원래는 오후 쉬린제 마을을 쉬엄쉬엄 다녀오고 내일 고대도시 흔적들을 본격적으로 보려고 했는데, 그냥 쉬도록 했다. 오늘로 여행이 열하루째. 전부 대중교통 이동이었고 계속 돌아다닌 셈이니, 휴식이 필요할 때도 됐다. 장기여행자에게 여정은 생활이니까. 점심을 먹고 나서 하하는 숙소에서 원 없이 유튜브를 보았고, 나는 그 덕분에 하맘을 경험해 볼 수 있었다. 건식사우나-습식사우나-때밀이-마사지 이렇게 코스로 1천 리라 지불. 유서 깊은 전통 하맘은 아닌 게 분명했고 그냥 숙소 가장 가까운 곳, 우리로 따지면 동네 목욕탕 같은 느낌이었지만, 나쁘지 않았고 한 번쯤 경험으로 좋았다.


숙소 내부 컨디션은 별로지만, 터미널 인근이라 터미널에서 미니버스로 쉬린제도 가고 에페수스도 가니 베이스캠프로 나쁘지 않은 곳이다. 이제 튀르키예에 익숙해져서 그런가 작은 동네에 식당과 상점들이 빼곡히 있지만 여행객들 못지않게 현지인들도 많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저녁 식당에서 옆 테이블에 중국인 가족이 앉아있는데, 우리 하하 또래로 보이는 아이까지 3인이 각기 다른 곳을 보며 남자는 핸드폰, 여자는 멍하니, 아이는 장난감을 손에 들고 혼자 노는 모습이었다. 현대인들에게 가족의 의미는 뭘까? 함께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다시 생각했다. 어린이날 집 앞 치킨집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봤다. 어린이날이라 하는 외식 같은데, 텔레비전 가장 가까운 좌석을 잡고는 아빠는 브라운관속 축구경기만 보고 있었고, 엄마는 가끔 아이에게 말고는 말이 없었다. 아이는 핸드폰을 보며 치킨을 먹고, 세 가족의 입은 오직 치킨을 먹느라만 움직이고 있었다. 보편제도로서의 가족은 언제쯤 붕괴될까?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하하를 보았다. 이 아이에게 나는 어떤 관계여야 할까.




다음날 에페수스와 쉬린제 마을을 다녀왔다. 하하에게 에페수스가 히에라폴리스와 비교해서 어땠는지 물었는데, 원형극장은 히에라폴리스가 더 인상적이었는데 전체적으로는 에페수스가 도시였다는 느낌이 더 든다고 한다. 원형극장 규모는 2만 4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에페수스가 더 큰데 아마 히에라폴리스에서 처음 원형극장을 봤을 때의 감동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3천 년 전 세워진 도시가 지금도 7세 아이의 눈에도 보일만큼 도시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는 건 경이로운 일이다. 켈수스도서관이나 원형극장 같은 기념비적 건축물들이 있기도 하지만, 식민도시로 건설되어 주변도시와 국가들에게 지배되는 역사를 통해 고대문명들이 연이어 발달한 역사적 유물이다. 성경의 에베소서가 사도바울이 에베소에 있던 초기 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라고 하고 성모마리아가 마지막 생애를 보낸 곳이라고도 하니, 종교적 신념을 가진 여행자들에게는 몇 곱절 의미 있는 여행지이겠다. 쉬린제는 실망스러웠다. 와인 저장고도 보고 전통방식의 와인제조장도 있고 그런 줄 알았는데 지금은 그냥 예쁜 와인판매 단지가 된듯하다. 더구나 단체로 온 관광객들을 데려가는 코스 상점도 있는듯해 더욱 기대 이하였다.

하하가 어제부터 케이크를 먹고 싶다고 해서 점심으로 근처 제과점에서 초콜릿케이크를 사가지고 왔다. 숙소주인한테 한 조각 크게 잘라 드리고 통째로 놓고 먹는데 입에 이렇게 안 맞을 수가. 둘 다 서로 먼저 못 먹겠다고는 못하고 눈치만 보다 내가 먼저 포크를 내려놓았더니 하하도 못 먹겠단다. 먹다가 생각난 건데 어제 그 상점 앞을 지날 때 케이크들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오늘 사러 갔을 때도 그대로였다. 쉰내까지는 안 났지만 오래된 빵의 식감이 안 좋았고 크림도 맛이 없는 게, 잘못 먹으면 배탈이 나겠다 싶었다. 숙소에서 주는 조식도 변변찮았는데 점심까지 망쳐서, 저녁은 든든히 먹이고 싶어 검색해 한인식당을 찾았다. 라면, 김밥, 떡볶이를 주문하고 앉아있는데, 식당 주인할머니가 터키인이 시키고 안 먹고 갔다며 불은 떡라면을 가져와서는 떡값은 무료로 해줄 테니 먹겠냐고 한다. 보통 이런 식으면 그냥 먹으라고 하지 않나. 남의 몫이었던 불은 라면을 돈 내고 먹기는 싫어 괜찮다고 하자, 주인은 그럼 자기가 먹겠다고 가져간다. 대형 식당이던데, 코로나로 한동안 타격을 보았기 때문이겠다 싶었지만, 한국에서보다 더한 인심을 이국땅 한국인에게서 접하니 기분이 씁쓸했다.


우리는 셀추크에서 2박을 하고 마르마리스라는 항구도시로 이동했다. 마르마리스는 여행자들이 많이 찾는 도시가 아니고, 그리스 가는 페리를 주로 타는 곳도 아니어서 버스 정보가 별로 없었다. 한 번에 가는 건 없고 셀추크에서 두 시간 거리 무글라에서 내려 미니버스로 갈아타고 한 시간을 더 가야 했다. 하루에 10시 버스 하나이고, 셀추크 터미널에서 단 한 군데 버스회사에서만 표를 팔고 있었다.


튀르키예 여행이 끝나간다. 하하는 모르겠지만 내 생애에는 아마 튀르키예를 다시 올 일은 없겠지. 튀르키예는 워낙 넓어서, 지역마다 색깔이 달라 여러 국가를 여행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나라다. 사람들도 친절하고, 현지물가는 싸기 때문에 주방이 있는 숙소를 택한다면 배낭여행자들이 경비를 절약할 방법도 있어 보였다. 이 모든 좋은 점들을 무색하게 만드는 것이 입장권 폭리가 아닐까? 그러나 튀르키예도 분명 유적지 말고의 매력이 있을 거다. 우리가 투어가 아니고, 직접 트레킹을 하면서 카파도키아에서 느낀 것들처럼. 너무 카파도키아에서는 벌룬투어를 해야 하고, 에페소에서는 고대도시를 봐야 하고, 파묵칼레에서는 석회온천에 가야 한다는 것이 루트가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그러나 또 평생 한번 올까 말까 한 곳을 제한된 시간 동안 여행하면서 가장 유명한 그걸 안 하기도 어려우니, 어떤 길에서든 선택은 참 쉽지가 않다.


마르마리스에서의 1박으로 2주간의 튀르키예 여행을 마치고 그리스로 가기 위해 국경을 넘는 배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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