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연애는 사랑해서 하는 건가요? 사랑은 뭐죠?
H를 만나고 집에 왔다.
그는 작년 7월 즈음 내게 어쭙잖은 추파를 던졌던 사람이다. 뚝딱거리면서 입에 음식을 넣어주고, 함께 식사를 하는 도중에 굳이 저 멀리 맞은편에서 일어나서 허리를 굽히며 내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줬다. 후에 나는 애인이 있다는 사실을 밝혔지만, 그가 호감으로 오해했을 만큼 우리의 대화는 흥미롭고 심도 깊고 물 흐르듯 이어졌다.
오늘도 그는 내게 물었다. 행복을 정의 내리는 순간 행복하지 않아 지는 경우가 많지 않냐고. 행복이 뭘까. 틀이란 건 뭘까. 날 고민하게 만든다. 과학자 주제에 엄청 철학적이다. 문과생 질투 나게.
강변을 산책하던 도중 꽃이 예쁘다고 하니 "사진 찍어줄까" 하고, 내가 재미있다고 생각해서 던진 말에 고개가 뒤로 훅 젖혀지며 빵 터지며 즐거워하고, 흥미를 느끼고 고심하고 생각한다. 식사 도중에 대화가 너무 재미있어서 궤도를 탈출해서 저 우주로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런 그가 연애를 한다고 한다.
나는 그가 작년에 추파를 던지기도 전에 연애를 시작했고.
이제 와서 이 모든 게 무슨 뒷북인가 싶지만, 난 이 선비 같은 남자와 연애를 하고 싶지 않고 그를 가지고 싶다. 내 옆에 Plaudertasche(수다쟁이, 직역:수다 주머니)로 두고 싶다.
이 사람의 일상을 매일 엿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울 것 같다. 무슨 사고를 하는지, 사고과정의 경로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속속들이 알고 싶다. 그런데 이런 말은 원래 애인에게 부여하던 말이 아니던가? "매일 보고 싶어서 결혼하게 되었어요."라는 공식 프러포즈 멘트처럼.
나의 이상은 여기서 충돌한다. 나는 사유하는 사람들과 함께할 때 귀 뒤가 쭈뼛거리는 강력한 쾌락을 맛보지만, 높은 비율로 그들에겐 성적 호감을 느끼기 어렵다. 고고한 이성의 영역에서는 '애인의 미덕중에 심미적 요소가 뭐 그리 중요한가' 외치고 있고, 나의 동물적 감각은 이미 파트너가 될 사람의 큰 키와 풍성한 머리숱 등을 스캔하고 있다.
그러므로 H와 연애를 한다면 "당신을 매일 보고 싶고, 당신의 생각을 매일 듣고 싶지만, 손은 잡고 싶지 않아요."라는 말이 나올 것 같고, F와 연애를 하고 있는 지금 "당신이 남자로 느껴지지만 당신의 생각은 너무 재미없어요."라는 말을 하고 있다.
나의 첫 연애는 심미적인 요소가 많은 부분을 차지한 것 같다. F와 점점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점점 빈곤해지는 내 지적 호기심을 책이나 팟캐스트로 보충하면서까지 그를 만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허기는 채워지지 않는다. 사람으로만 채워지는 호기심이 있는 것 같다. 책은 마치 잘 만들어진 밀키트 같은 반면, 사람과 함께 하는 대화는 갓 만들어진 따뜻한 집밥 같다. 난 생동감 넘치는 대화 상대가 내 앞에 필요하다.
H도 현 애인과는 사유하는 대화를 애인과 할 수 없다고 한다. 같은 분야를 공부하기 때문에 갖는 공통적 관심사, 또는 한국 사람이어서 할 수 있는 대화 외에 너드한 질문들이 잘 통하지는 않는다고. 내 너드함과 그의 너드함은 일맥상통하는데, 사실 우리는 아주 잘 맞는 한 쌍인데, 현재 나의 우선순위와 그의 우선순위가 달라 엇갈리는 것 아닐까 싶다.
아, 각자 연애하는 사람을 두고 이런 망상을 펼치는 나는 얼마나 바보 같은가.
친구를 정의 내리는 일은 나에게 너무나 쉬운 일이었지만, 연애와 애인에 대해서는 현재에도 머릿속엔 온통 물음표뿐이다. 선택한 애인에 대해서는 좋고 싫은 값이 나오지만, 상상의 애인은 결과를 주지 않는다. 그래서 경험을 많이 해보라는 걸까? 연애를 많이 해본 사람들은 내게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줄 수 없다"라고 충고했다. 근데 나는 한 사람에게서 모든 것을 바라고 싶다. 이 고민은 늦깎이 연애학도에게 내려지는 엄벌 같은 걸까? 언젠가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애인의 미덕 중에 대화의 순위가 성적 매력보다 앞서는 날이 오기를 바랄 뿐이다.
연애라는 것은 통칭일 뿐,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아주 다른 세상을 마주하는 것 같다. 즐거움을 사랑이라고 정의하거나, 성적인 만족감을 사랑이라고 정의하거나... 내가 최고로 여기는 가치를 가진 사람과 하는 생활이 사랑인 걸까. 과연 나는 내 생에 연애와 애인과 결혼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 있을까?
202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