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happysmilewriter
May 08. 2024
아진이는 중학교 친구인 M과 대학로 2시 연극을 예매해 놓았다. M이 오전에 일이 있어서 2시 연극을 보기 전 극장 바로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1시에 만나 간단한 점심 먹기로 약속이 되어있었다. 11월 기말고사 친 후 바로 대구로 내려왔다. 2달 정도 단기 과외를 하고 매일 술 약속에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다. 이제 올라가서 전공 공부도 시작하고 토익 공부도 해야 한다. 서울로 올라가는 날 대학교 앞 자취방에서 같이 살고 있는 M을 만나 밥도 먹고 연극을 보기로 했다. M과 아진이는 다른 대학교이지만 멀지 않은 곳이라 방값도 아끼고 서로 도움도 줄 겸 1학년 때부터 함께 살았다.
연극은 연인끼리 봐야 하지만, 현재 두 사람은 여자 친구가 없다. 모태 솔로라 할 수 있는 M과 6개월 전 섬세하지 않다는 한마디만 남기로 이별을 고한 여자 친구로 인해 현재 솔로인 아진이는 솔로라는 공통점 때문에 예전보다 더 친해졌다. 남자끼리면 어떠냐고 외치며 연극과 영화도 보고, 같이 밥과 술을 먹으러 간다. 간혹 이상한 시선을 느끼기도 하지만, 뭐 어떤가. 꼭 이성과만 밥 먹고 연극 보는 건 아니지 않은가? 법으로 제정된 것도 아니니.
2주 전 코레일톡 앱에서 동대구에서 서울역으로 가는 오전 10시 40분 기차를 예약했다. 아진이는 약속 시간보다 일찍 가는 것도 싫어하는 성격이지만, 늦는 것도 싫어한다. 둘 중 굳이 따진다면 일찍 가서 혼자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을 더 싫어한다. 네이버 지도를 꺼내 예상 시간을 계산 후 10시 40분으로 예매한 것이다. 아침 9시에 일어나 세수만 하고 나간다고 계획을 하고 알람을 맞춰놓았다. 7시쯤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린다. 이렇게 아침 일찍 전화 올 사람이 없다. 무슨 일인가 해서 두 눈을 억지로 떠서 시계를 본다. 암막 커튼 탓인지 깜깜해서 시계가 잘 보이지 않는다. 침대 옆 협탁에 오른손을 펼쳐 더듬거리며 휴대폰을 찾는다. 벨소리가 오늘따라 경박하게 들린다. 좋아하던 노래인 'At My worst'로 벨소리를 설정했는데, 오늘 아침에는 무척 경박스럽게 느껴진다. 실눈으로 휴대전화 화면을 켜 시간과 누구한테 전화 온 것인지 확인한다. 오늘 만나기로 했던 M이다.
"야, 왜 이 시간에 전화해?"
"오전 일 없어졌어. 기차 시간 바꿔. 일찍 만나 맛있는 거 먹자. 빨리 일어나. 세수만 하고 뛰어나와"
"아이, 귀찮아. 알았어. 기다려."
억지로 일어나 방의 불을 켠다.
코레일톡 앱에 들어갔다. 예약조회에 들어가 오늘 표 아래에 있는 여행 일정 변경을 누른다. 시간을 앞당기고 싶었으나 앞의 모든 기차가 다 매진이거나 입석과 좌석을 함께하는 자리조차 예약대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원래 예약한 시간대로 갈 수밖에 없다. M에게 원래대로 만나자고 톡 했다. 아진이는 이왕 일어났으니 다시 잘 수 없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세수를 하고 전기포트의 전원을 눌렀다. 티백 커피를 꺼내 컵고리에 걸었다. 끓인 물을 핸드드립용 작은 주전자에 넣고 천천히 물을 부어 내린다. 커피 한잔을 마시고 넷플릭스로 영화를 선택해서 보기 시작했다. 9시 55분에 알람이 울리자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서울역 KTX 기차가 제시간에 왔다. 입석인 사람들이 각 호차 중간 통로에 가득 서있다. 1시간 40분을 저렇게 서서 가야 하는 사람들이 안쓰럽게 느껴지지만 자리를 양보할 생각은 없다. 기차에 앉아 휴대전화를 펴서 넷플릭스를 검색한다. 볼 게 없다. 아진의 시선은 기차 좌석 그물망에 꽂혀있는 KTX라는 잡지 2월호에 머무른다. 책을 집어 들어 읽는다. 강릉, 목포 등 아진이가 가고 싶었던 지역에 대한 소개가 되어 있어 열심히 읽고 사진까지 찍어준다. 그래도 시간이 남아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한다. 아침에 마신 커피 탓인지 잠도 오지 않는다. 도착하기로 한 12시 25분, 제 시각에 서울역에 도착했다. 순조로운 일정이다. 아진이는 몇 분도 지연되지 않고 제시간에 들어왔음을 확인하고 미소 짓는다. 지금까지 서울역에서 동대구로, 동대구에서 서울역으로 가는 많은 기차를 탔지만 지연되지 않은 적은 거의 없었다. 오늘은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잘 진행되기 시작한다고 생각하는 찰나 물밀듯이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로 긴장을 한다. 어깨에 멘 백팩이 잘 매여있나 확인한다. 휴대전화와 지갑이 잘 있는지도 확인 후 계단과 에스컬레이터 중 어디로 갈지 고민한다. 에스컬레이터 줄은 너무 길어 한참이 걸릴 것 같다. 그나마 계단이 내 속도대로 갈 수 있는 곳이라 계단으로 올라간다. 계단을 올라가다 보니 바로 앞에 어깨가 굽은 긴 파마머리 여자가 작은 백팩을 메고 사선으로 또 다른 가방을 메고 있다. 빠른 속도로 올라가는 사람들 틈에 그 여자는 단연 눈에 띄었다. 계단 두 개를 성큼 올라가고 싶은데, 앞의 여자 때문에 그러지를 못한다. 가방을 맨 틈도 앞뒤 사람들에 의해 눌러져서 불편한 상황이라 앞사람의 속도에 따를 수밖에 없다. 한숨을 쉬며 앞에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 여자를 살핀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데, 뭔가 긴장했는지 온몸에 힘이 들어가 있다. 사선으로 맨 가방을 누가 훔쳐 가기라도 할 것처럼 오른손으로 가방을 잡고 왼손으로 왼쪽 끈을 잡고 있다. 넘어지기라도 할까 봐 땅만 바라보고 있는 그녀는 어깨가 심하게 굽어있다. 예쁜 파마도 아니라 시골 장터에서 하는 파마를 한 듯 촌스러운 파마에 20대 같지 않게 염색기가 하나도 없는 검은 머리이다. 아진이는 그녀를 파마가 참 안 어울리는 스타일이라고 생각하며 바라본다. 전체적으로 답답한 스타일이다. 어깨를 넘어 허리까지 오는 길고 검은 머리에 촌스러운 파마를 하고 꾸부정한 등으로 땅만 바라보며 걷는 여자는 입은 옷마저 답답했다. 길다 못해 본인 발목까지 올 듯한 긴 코트를 입었다. 깔끔한 검은색도 아니라 회색, 갈색, 보라색 등이 섞인 우중충한 색의 코트이다. 아진이는 계단을 올라갈 때 조금이라도 앞에 있는 그녀에게 부딪칠까 싶어 힘을 잔뜩 줬다. 계단 끝에 올라오니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이때가 기회다 싶어 얼른 그녀를 제치고 나와서 지하철역으로 내려갔다.
사람들이 붐비는 시각, 토요일 오후의 지하철역은 어수선하다. 내려가는 사람, 올라가는 사람이 서로 부딪칠 정도이다. 아진이는 대학로로 가는 당고개행 4호선 플랫폼에 서있다. 지하철 도착하기까지 1분 남았다. 멍하니 앞만 바라보고 있는데,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아진이는 이상한 느낌의 정체가 뭔가 싶어 왼쪽을 바라보았다. 아까 바로 앞에 있던 답답했던 파마머리의 여자 J였다. 아진이와 J는 같은 공간에 서 있다. 잠시 후 그녀도 같은 지하철을 탄다. 답답한 느낌이 아진의 관심을 끌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지 않는다. 1초 정도 그녀를 바라본 후 아진이는 휴대전화를 열어 사회, 정치면의 포털사이트를 도착할 때까지 집중해서 보고 있었다.
혜화역에 도착했다. 아진이는 지하철에서 내려서 계단으로 올라갔다. 앞사람의 뒷모습이 어딘가 친숙하다. 서울역 기차역에서 만났던 바로 그 J이다. 아진이는 한숨을 쉰다.
'오늘따라 왜 이 여자가 자꾸 보이는 거야? 그냥 답답하다. 답답해'
J는 핸드폰을 보며 걸어가고 있었다. 호기심이 들어 아진이는 J의 옆쪽으로 걸으며 곁눈질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본다. 얼굴이 부자연스럽다. 여전히 J는 눈을 내리깔며 가고 있었는데, 쌍꺼풀 선이 눈 크기처럼 크게 그어져 있다.
'성형수술 부작용이 틀림없어. 그 의사는 왜 저렇게 수술했대? 무면허 의사한테 한 거 아니야? 사람 얼굴 다 망쳐놨네.'
눈보다 더 이상한 점이 있었다. 윤곽 수술을 했는지, 역삼각형 형태의 얼굴 형태가 인조인간 같은 느낌을 주었다. 뺨이 시작되는 부분부터 턱까지 칼로 오려낸 듯 세모 형태였다.
'어떻게 턱을 깎아도 저렇게 깎았을까? 진짜 저 여자분 큰일이네. 예쁜 게 아니라 얼굴 보기 두려울 정도로 이상해. 에고 나중에 윤곽 수술 할까 했었는데, 저 여자분 보니 안 되겠다. 그냥 이대로 살아야겠어.'
그때, 아진이와 J는 눈이 마주쳤다. 둘은 왠지 모를 정적 후 금방 눈을 피했다. 당황한 아진이는 걸음을 빨리 해 그녀 옆을 지나쳐 올라갔다. M의 전화가 왔다. 에어팟을 끼고 있던 아진이는 M과 전화 통화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