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친정엄마는 딸이 다섯이다. 다섯의 아이를 키우며 청춘을 보냈고, 다섯의 아이와 씨름하며 주름살이 늘었다. 지금은 그 다섯 아이가 모두 결혼해 사위가 다섯이고, 손자들은 그 이상이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했던가. 평소에도 생각이 많고 본인을 돌아보는데 많은 에너지를 쓰는 나의 엄마는 지금도 자식들과 손주 걱정에 주름살을 더 늘리고 계시다.
엄마는 이런 마음으로 자식을 키우셨다고 했다. 하얀 도화지. 아이는 하얀 도화지이고 본인은 화가인데, 이 도화지에 어떤 그림을 그리느냐에 따라 그 아이의 삶이 달라질 거라 생각하셨다고 했다. 그래서 아이 키우는데 더 많은 정성을 들이고, 부모는 평생을 노력해야 하는 거라고.
나는 우리 엄마의 이 이론에 한 가지를 더 보태려 한다. 검은 도화지. 아이는 검은 도화지이다. 밑바탕에 이미 색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 그 위에 부모는 그림을 그린다. 어린 시절 미술 시간에 해보았을 ‘스크래치 그림 그리기’를 연상하면 되겠다. 미술 전문가가 아니라서 ‘스크래치 그림 그리기’가 정식 명칭인지 모르겠지만, 스케치북 가득 색깔을 채우고 그 위에 검은 크레파스를 칠한 다음 뾰족한 것을 긁어 그림을 그리는 것. 부모는 그런 존재인 것 같다.
아이는 이미 본인의 색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것을 제대로 발현시킬 수 있게 돕는 존재가 부모라는 뜻이다. 좋은 양육 환경을 만들어 주고, 제대로 된 교육을 하여 아이가 가지고 태어난 그 색이 멋진 그림으로 그려지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러나 부모가 이곳에 파란색이 있어야 한다며 빨간색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를 막 나무라면, 그림은 완성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불가능하다 할 수 있다. 그곳에 빨간색이 없는데, 빨간색을 내어놓으라 하면 어떻게 될까. 부모는 검은 바탕 여기저기를 긁어 억지로 빨간색을 찾아내거나, 빨간색이 없는 이 아이를 부정하게 될 것이다. 그림은 거기서 멈춘다. 완성되지 않는다. 그러나 부모가 아이의 파란색을 수긍하고 다시 그림을 그려 나가면, 누가 알겠는가, 걸작이 나오게 될지.
그림을 그리는 부모의 획도 중요하다. 어느 부분을 긁어낼 것인가. 이미 아이는 아름다운 색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부모가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엉뚱한 곳만 긁어내면, 아이는 딱 그만큼의 크기만큼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 아이가 성인이 되어 빛 밝은 어느 곳에 다다라 ‘아 나에게 이런 아름다움이 있는데 몰랐네’라며 뒤늦게 발견할 수도 있지만, 아무튼 부모의 손에 의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몇 년 전부터 ‘생긴 모습 그대로 존중받는 삶’은 참 가치 있고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 삶이 그러지 못했다는 고백이고, 내 아이를 그런 가치로 키우겠다는 다짐이다.
검은 도화지에 어떻게 그림을 그릴 것인가?(출처: 픽사베이)
아이들의 글쓰기 코칭을 하겠다 마음먹은 지금도 그 가치는 유지된다. 나는 아이들의 생긴 모습 그대로 존중되는 글쓰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다. 글은 마음이고 생각이다. 본인의 고유성이 가장 많이 발현되어야 하는 곳이다. 그런데 그곳에 어른과 부모의 시각으로 이런저런 잣대를 들이밀면 아이는 흥미를 잃는다. 하고 싶지가 않다.
글 한 편을 잘 써서 뭔가 큰 성과를 얻어내야 하는 상황 즉 공모전에 상을 타야 한다거나, 원하는 학교의 당락이 결정된다거나 등의 일이 아니라면 아이가 쓰고 싶은 대로 쓸 수 있으면 좋겠다. 아이가 글의 흥미를 얻고 평생 쓰는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거나, 아이가 글을 통해 사고가 깊어지길 원하거나, AI 시대에 능력자로 성공하길 원한다면 그냥 아이가 쓰고 싶은 대로 쓸 수 있게 두면 좋겠다.
그렇다면 아이가 원하는 대로 쓰게 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아이가 글쓰기 과제가 있거나 아니면 어떤 계기로 글을 쓰게 될 때 어른이나 부모가 함께 있어 준다. 물론 아이가 원한다면 혼자 쓰게 둔다. 아이는 글을 쓰다 모르는 부분을 어른에게 묻는다. ‘이걸 뭐라 불러?’라고 모르는 단어를 물어볼 수도 있고, ‘이거 이렇게 쓰는 거야?’ 맞춤법을 물어볼 수도 있고, ‘이렇게 쓰면 되는 건가?’ 적절한 문장이나 문맥의 흐름을 물어볼 수도 있다. 어른은 그 질문에 자신이 알고 있는 최대한으로 답해주면 된다. 모르는 경우 인터넷에 찾아 알려줄 수도 있다. 그리고 아이가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른다고 할 때, 적절한 질문으로 아이가 ‘말’을 할 수 있게 해 준다. 아이는 말로 쓴다. 생각을 물어보면 의외로 주절주절 자기 생각을 잘 말한다. 그다음 ‘그렇게 써.’라고 하면 된다. 정말 아이가 말한 그대로를 쓰게 한다. 그것이 그 아이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가 한 말을 잘 기억해 뒀다가 글의 진도가 안 나갈 때 ‘아까 그렇게 말했잖아.’라고 던져준다. 또 막히면 ‘그럼 그 반대 상황은 어떨까?’라든지 ‘제일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해?’라든지 아이의 생각을 넓힐 수 있는 질문을 해준다. 아이의 글쓰기는 딱 이 정도면 될 것 같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신이 쓰고 싶은 대로 쓰면 아이는 글쓰기가 재밌어진다. “우리 이제 쓸까?” 했을 때 별 거부감 없이 연필을 잡을 수 있게 만드는 것. 아이들에게 바라는 것은 딱 그 정도이면 좋겠다.
글은 머릿속의 생각이나 마음속의 감정을 다른 사람이 알아보고 이해할 수 있게 적는 것이다. 다만 그것을 더 잘 알아보고 이해하라고 수필, 소설, 논설 등의 형식을 입히는 것이고, 더 명확하게 보이려고 서론, 본론, 결론을 나누거나 원인과 결과에 따른 이야기 흐름을 만드는 것이다. 그 외에 문장력이나 표현력을 갈고닦는 것은 수많은 글 중에 내 글을 돋보이게 만들려는 것이다. 그런데 어른들이 생각하는 좋은 글 또는 잘 쓴 글은 그 기술력까지 들어간 글이다. 그 정도는 돼야 글을 잘 썼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기술이라는 것은 연마의 시간이 필요한 작업이다. 또 나이를 먹으면 어렸을 때보다 더 잘하게 되는 부분도 있다. 그러므로 이제 막 일기나 독서록 등으로 글쓰기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들에게 너무 잘 쓴 글 또는 기술적인 글을 요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희망 하나 더. 글이 아이에게 치유였으면 좋겠다. (출처: 픽사베이)
그리고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희망 사항이 하나 더 있다. 현실적이지 않고 이상적이라고 한 것은 이뤄지기 힘들지만, 아름다운 바람이기 때문이다. 바로 자기 치유이다. 글을 통한 자기 치유. 아이가 공부가 너무 힘들 때, 친구 관계로 어려울 때, 앞이 보이지 않고 캄캄할 때, 모든 게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아 너무 지치고 괴로울 때, 어느 누구도 자신의 얘기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고 느낄 때, 그런 모든 멘털이 흔들리는 순간에 아이가 글을 썼으면 좋겠다. 글을 쓰며 자신의 현재 마음을 알아채고, 단단하게 다지고,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갔으면 좋겠다. 가장 간편하고 확실한 자기 치유다. 글은 그런 힘이 있다. 힘든 순간 나에게 글이 그랬고 지금의 나에게는 ‘넌 가치 있어.’라고 말해준다.
서점의 글쓰기 책들을 보면 어떻게 아이를 쓰게 할 건지에 대한 내용들로 가득하다. 한 문장에서 시작해 한 편의 글이 되도록 하는 문제집 형태의 책도 있고, 일기를 어떻게 쓰고 독후감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형식을 알려주는 책도 있고, 글쓰기와 문해력을 관련시켜 매우 중요한 작업이라 성토하는 책도 있다. 그러나 아이가 쓰고 싶은 글을 쓰게 하라는 책은 없어 안타까웠다.
아이의 글쓰기는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좀 다르다. 아이와 글쓰기를 해보면 의외로 자신의 생각이 명확해서 놀란다. 그런 것까지 생각하는구나 감탄할 때가 있다. 그러나 당연한 말이지만 어른만큼 깊게 생각하지 못해 답답할 때도 있다. 어른이 보기엔 너무 하찮은 것에 집중해서 그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우겨서 ‘이건 아닌데’ 싶을 때도 있다. 이 말했다가 저 말했다가 통일성이 없고, 글씨는 또 얼마나 엉망으로 쓰는지 아마 그 앞에서 한숨 쉬지 않는 어른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수용해야 한다. 아이의 글쓰기는 그런 것이니까. 그런 모습이니까. 어른 눈에 ‘엉망’이더라도 한 번쯤은 그렇게 쓸 수 있게 해 줬으면 좋겠다. 사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도 혼나지 않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활동이 글쓰기라 할 수 있다. 아이에게 안전한 일탈로 글쓰기를 선사해주면 어떨까? 글이 만만해진 아이는 어른이 되어 뭔가를 써야 할 때 두렵지 않게 첫 문장을 쓸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