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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효진 Apr 25. 2024

밉상의 위력

"엄마 목이 너무 아파."

"나도 아파"


눈뜨자마자 아들과 딸이 목이 아파 침을 삼키기도 힘들다며 순서대로 울상이었다. 

엄마의 촉으로 들어보니 절반은 맞는 말이었다. (절반은...)


"목이 너무 아픈데 오늘은 학교 안 가면 안 돼?


사실상 원하는 목적 앞에 안돼 소리가 나와야 했지만 찡그린 얼굴과 아프다는 말이 계속 가시가 되어 맴돌았다. 하필 날은 흐리고 눈에 띄지 않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학교 가기 제일 귀찮은 날씨였다. 

새벽에 들어온 남편은 오늘 조금 늦게 출근해도 될 것이다. 왜냐면 내가 생각해 둔 집 근처 병원은 차 안에서 대기해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일본 병원 몇 곳은 접수하고 차 안에서 대기한다.)


간단히 죽을 먹고 남편이 깨자 준비하고 병원으로 향했다. 비는 오지 않았지만 보기만 해도 찌뿌둥한 하늘이었다. 접수를 하고 차에서 기다렸다. 기다림의 시간을 위해 책을 가져갔지만 태블릿과 책의 비율이 7대 3으로 패배했다. 옥신각신 실랑이 하는 와중에 드디어 순서가 되어 의사를 보는 순간이 제일 행복함을 느낀다. 이제 임무의 한 단락을 끝낼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친절한 의사는 청진을 하고 바이스러스 검사를 위해 입을 살짝 쑤셨다. 그리고 한 차례의 기다림 끝에 설명이 이어졌다. 아이들은 잘 자고 물 많이 마시면 되지만 그래도 왔으니 약은 처방해 주겠다는 느낌이 물씬 들었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하루 집에서 쉬자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아이들은 급격히 쌩쌩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안함을 애써 무시하며 결제를 하고 약국으로 향했다. 사실 차 안에서 남편과 살짝 기싸움이 있었다. 내가 본 신문기사 이야기를 들려줬는데 남편이 찾아보더니 나의 오류를 알려줌에서 시작되었다. 그냥 넘기면 될걸 굳이 찾아서 친절하게 조목조목 짚어주는 얼굴에 밉상이 그득했다. 남편 얼굴에 묻은 밉상이 어느새 내 얼굴에 전염됐는지 뚱하게 튀어나온 입을 하고 약국으로 들어갔다. 


처방전을 주었다. 한참을 확인하더니 약이 한 아이분량밖에 없다고 했다. 다른 약국으로 가던지 하나라도 조제를 부탁하던지 해야 했다. 


'또다시 비가 추적추적 오는데 다른 약국을 헤매는 짓은 못하지. '


나는 결연히 일인분을 부탁했다. 여기는 올 때마다 약이 없다고 그러네... 꿍시렁대며..


들어갔을 땐 아무도 없었는데 그 후로 한 명, 두 명, 세명, 네 명 계속 사람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들은 차례차례 약을 받아 나갔다.


나. 보. 다. 먼. 저.


안 그래도 뚱하게 튀어나온 입이 더 튀어나오기 시작하고 슬슬 눈꼬리마저 찢어지기 시작했다. 


'설마 내 말을 이해 못 한 건 아니겠지? 내 처방전을 깜빡했나? 누락됐나?'


사람이 득실득실대는 대형약국도 아니고 뻔히 오가는 몇 명의 사람들이 뻔히 헤아려지는 곳이었다. 나보다 늦게 온 5명가량의 사람들 대부분이 빠져나가자 나는 확신했다.


'외국인이라고 차별하다니! 대놓고 차별이네 정말!!!'


이쯤대자 친절하게 약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는 약사얼굴에도 밉상이 가득해 보였다. 

그때 막내인듯한 막내직원이 설문지를 가지고 친절하게 다가왔다. 나는 얼마 전에 작성했다는 말을 굳은 얼굴로 반복하며 거부했고 직원은 꽤나 당황한 얼굴을 하며 돌아갔다. 


그리고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약국에 들어온 지 40분 정도가 지난 후였다. 약사가 약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나는 대충 알아들었지만 모르는 시늉을 했고 약사는 어렵사리 영어로 설명해 주었다. 설명이 끝나고 나는 결심한 듯 한마디를 했다. 


"나는 여기 40분 전에 들어왔고 약을 거의 꼴찌로 받았습니다.  약 만드는 시간이 그렇게 오래 걸리나요?"


내가 꽤나 빠르게 영어로 말했는지 그들은 매우 당황해했고 알아듣지 못했는지 답변을 하지 못했다.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기에 짧게 인사를 하고 나왔다. 


그리고 집으로 와서 내가 겪은 일에 대해서 남편에게 침 튀기며 설명했다. 


"어떤 사정이 있었을 거야. 나도 한국에서 그런 적 있었는데 그럴 땐 중간에 확실하게 어필을 하면 돼. "


헐... 남편의 위로랍시고 내뱉는 말에 나는 물 만난 물고기가 되어 남편을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 누구 편을 드는 것이며, 내가 이렇게 억울한데 어떻게 약국 편을 들 수가 있으며, 내 마음은 안중에도 없냐며.... 어쩌고저쩌고...


내 얼굴이 노랑에서 빨강으로 바뀌자 남편은 서둘러 사과와 위로를 반복하며 꼬리를 내렸다. 그리고 약국은 하늘이 두쪽이 나도 가지 말아야 할 블랙리스트가 되었으며 나는 마음에 생채기가 난 한국인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약간 우쭐한 기분이 되었다.


그리고 글을 쓰는 지금에서야 솔직해져 본다. 어제 나보다 먼저 약을 타간 사람들은 모두 제조하지 않은 알약들이었으며(매의 눈으로 스캔했다.) 나의 약들만 가루로 분쇄해서 봉지로 받은 제조약이었다. 그리고 그 이전에 약국을 몇 번 경험한 바로는 일본약국의 대기시간은 보통 길었다. (내가 받은 제조약들은) 그리고 그런 사실들은 남편을 향한 나의 넋두리에서 모두 제외되었다. 제외된 넋두리들의 억울함 덕택에 나는 남편에게 보잘것없는 승리를 거두었다. 차에서 나의 오류를 조목조목 짚어대던 남편의 밉상에 대한 조촐하고도 허무한 승리였던 것이다.(지금 생각해 보니)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은 무심결에 읽은 신문기사에서 비롯되었음을 고백한다. 

사실 약국에서의 일들이 정말 차별이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하지만 그날 내 얼굴에 밉상이 붙지 않은 마음상태였더라면 그렇게 삐뚤어진 눈으로 상황을 판단했을까 싶은 마음이 든다. 

벤뎅이 소갈딱지만한 내 속을 까발리는 것 같아 부끄럽지만 앞으로는 부끄럽고 싶지 않고자 써본다. 

그리고 약국 직원분들께 죄송한 마음을 담아드리고 싶다.(라고 하지만 보낼 방도는 없는 게 참으로 죄송하다...)

그리고 앞으로 밉상 녀석은 웬만하면 붙는즉시 바로바로 떼버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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