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 사직터널을 지나 지하차도를 타지 않고 통일로로 가면 왼편에 돌로 쌓은 아치문이 하나 있다. 독립협회가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기념하고 사대관계를 청산한다는 의지로 만든 독립문이다. 원래 이곳은 조선 왕이 명나라와 청나라 사신을 맞이했던 영은문이 있었는데, 이를 헐고 지은 것이다.
독립문을 뒤로하면 왼편에 붉은 벽돌로 된 담이 하나 보이는데, 입구에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일제 때는 독립운동가를, 독재정권 시절에는 민주운동가를 수감하고 고문했던 감옥으로 악명이 높았기에, 독립문이 세워진 이후 수난으로 가득했던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잘 보여준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다사다난했던 과정을 보여주는 독립문과 옛 서대문형무소로 가보자.
독립문
독립문은 서울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바로 왼편에 있다. 나는 역에서 3번 출구로 나와 고가차도를 따라 내려와서 횡단보도를 건너 건너편으로 가면 아치형 문을 볼 수 있다. 전국 각지에서 차량으로 오는 경우 한남대교를 건너 남산1호터널을 지나 퇴계로를 따라 서울역에서 우회전해 통일로로 계속 가다 보면 현저고가차도 바로 앞 왼편에 보인다.
문 위를 보면 양쪽에 태극기가 있고 오른쪽부터 ‘독립문’이라는 한글 글씨가 새겨져 있다. 글씨는 누가 새겼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당시 독립협회에서 활동했던 이완용의 필적인지 조선말 개화파 문신이자 독립운동가였던 김가진의 필적이라는 설이 있는데, 둘 다 한글 필적을 대조하기 힘들어 명확히 확인하긴 어렵다. 문 뒤로는 한자로 ‘獨立門’이 새겨져 있다.
문 앞에 보면 돌기둥 둘이 나란히 있는데, 조선 태종 7년(1407) 황제의 영이 적힌 조칙(詔勅)을 가지고 온 명나라 사신을 직접 맞이하기 위해서 세운 영은문의 흔적이다. 문 옆에는 사신을 맞이하는 객관인 모화관이 있었는데, 조선 왕세자와 백관들이 사신에게 재배의 예를 행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청일전쟁 때 청나라가 패하면서 조공의 예가 사라지자 모화관이 폐지되고, 서재필이 중심이 되어 독립협회를 세우고 사대주의의 상징인 영은문을 헌 것이 오늘 주춧돌로 남은 것이다. 독립문은 청나라 사대외교에서 벗어나 조선의 주체성을 보여주기 위해 세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 독립문의 위치는 구한말 당시 위치에서 북서로 70m 떨어졌는데, 1979년 성산대로를 개설하면서 이전한 것이다.
독립문 정면. 문 앞의 커다란 두 주춧돌은 영은문의 흔적이다. 청과 사대주의를 청산하고 스스로 나아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독립문을 자세히 보니 파리 에투알 개선문과 비슷한 형태다(다만 크기는 작다). 서재필이 개선문 형태로 스케치하여, 스위스계 러시아인 세레진 사바친이 설계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건축을 담당한 이는 조선인 건축기사 심의석이 담당했다.
심의석은 미국 감리교 선교사를 만나면서 서구건축에 눈을 떴는데, 배재학당, 정동제일교회, 덕수궁 석조전이 그의 손을 거쳤다. 당시 몇 안 되는 서양건축 전문가였기 때문이다. 물론 대한제국의 성역이었던 환구단과 황궁우와 같은 전통 건축에도 관여했다. 심의석과 독립문은 구한말 이후 목조 건물 중심에서 석조를 거쳐 오늘날 철근콘크리트 중심으로 건축의 방향이 바뀌어 가는 모습을 말해주기도 한다.
중국의 사신을 대접했던 모화관을 헐고 새로 지은 독립관. 이곳에서 애국토론회를 개최하여 자주, 민권, 자강 사상을 고취했다.
일제강점기 때 독립문은 어떻게 보면 일제의 눈엣가시로 보일 수도 있었는데, 철거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우리 입장에서는 씁쓸한 이유인데,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이겨서 조선을 청에서 독립시켰다는 프로파간다로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광복 후에는 독립협회가 바랐던 본연의 정신 그대로 계승되어 현재에 이른다.
문 뒤편에는 독립협회와 독립문 건립에 적극 힘썼던 서재필의 동상이 있다. 그의 인생도 인상 깊은데, 약관의 나이에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킨다. 하지만 3일 천하로 끝난 후 연좌제에 엮여, 본인과 일부 친척을 제외하고 가족이 몰살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이후 미국으로 망명하여 의사가 된 서재필은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으로 개명하고 미국 시민권을 획득한다. 이후 갑오개혁 때 갑신정변 주동자에 대한 사면령이 이뤄져 다시금 조국 땅에 올 수 있었다. 이때 바로 독립협회 활동을 하며 독립신문을 창간한 것. 하지만 대한제국 정부와 관계가 틀어지면서 미국으로 다시 돌아간다. 이후 자신의 거처인 필라델피아에서 3.1 운동에 참여한 후 의사 일에 매진하며 살았다.
가족을 몰살했던 조선 조정에 환멸감을 느껴 미국인이 된 것이 아닐까? 독립협회에서 활동할 때는 한국말을 거의 안 썼다니까. 하지만 친일로 변절한 박영효와 달리 원한을 극복하며, 조선 독립에 힘썼기에 생애 마지막 즈음에 해방된 조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젊을 때는 열혈 개화파였지만, 세월의 풍파를 겪으며 원숙함이 더해진 인생이 아니었냐는 생각이 든다.
송재 서재필 동상. 독립문과 독립관을 설립한 주역이다. 갑신정변의 열혈 청년은 훗날 미국인이 되어 독립협회에서 활약한다. 구한말부터 해방까지의 격동의 시대를 산 인물이다.
서대문형무소
독립문을 지나 계속 직진하다 보면 왼편에 벽돌로 된 담장이 하나 보인다. 입구에 쓰인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가를 투옥하고 고문했던 장소로 악명 높은 곳이기도 하다.
입구를 들어가면 청사처럼 보이는 건물이 하나 있는데, 1923년에 지어진 보안과청사다. 형무소를 업무를 총괄한 건물이지만 오늘날은 형무소의 역사를 말해주는 전시관으로 탈바꿈했다. 형무소는 1907년 일본인이 설계하여 건립한 근대감옥인데, 초기에는 경성감옥으로 불렸다. 그러다가 원래 경성감옥이 마포로 이전하면서 서대문감옥으로 이름이 바뀐 후, 1923년 서대문형무소로 이어졌다.
서대문형무소역사전시관.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보안과청사였다. 해방 전에는 독립운동가를, 해방 후에는 민주운동가들을 탄압한 역사를 전시했다.
형무소는 독립운동가를 탄압하기로 악명 높은 곳이었다. 구한말 독립문을 건립하면서 자주정신이 깃든 조국을 꿈꿨지만, 얼마 안 가 경술국치로 나라를 뺏기게 되는 비운의 역사를 맞이하게 되었다. 3.1 운동이 있은 후에는 더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체포되어서 옥사를 늘리게 된다. 이전보다 무려 10배의 인원으로 늘어나면서. 하지만 감옥에 수감된 조상들은 궂은 고문 속에서도 독립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전시관을 돌면서 내가 몰랐던 사실이 있는데, 해방 후 독재정권이 민주주의를 부르짖었던 이들을 여기에 수감했다는 게 충격이었다. 해방되고도 서울형무소, 서울교도소, 서울구치소로 이어졌으니까, 심지어는 정치공작으로 생사람을 잡은 인혁당 사건 피고 8명의 사형이 집행된 곳이 여기였다.
서대문 형무소의 역사. 일제강점기 때는 독립운동가들을, 해방 후 독재정권은 민주운동가들을 탄압했다.
해방 전에는 외국이 우리를 탄압했다면, 그 후에는 같은 나라 사람을 정치 견해가 다르다고 인권을 짓밟고 탄압했던 장소였다니 뭐라 말이 나오지 않는다. 1987년 구치소를 의왕으로 이전하면서 서대문형무소는 어둠의 역사를 뒤로 하고, 기념관으로 이어진다.
전시관을 둘러보고 지하로 내려갔는데, 독방들과 고문도구들이 전시되었다. 독립운동가를 물로 고문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좁은 관에 밀어 넣어 감금하거나, 독립운동가들을 좌우로 가시가 박힌 나무상자에 넣어 흔들어 고문했다는 내용까지. 너무나 끔찍하다. 살점이 찢기고 몸이 고되어가는데도 독립정신을 잃지 않은 운동가들의 정신이 강했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서대문형무소의 고문행태와 도구들 : 살점이 찢기고 몸이 고되어가는데도 독립의 염원을 잃지 않았다.
옥사 건물들
전시관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오니 중앙을 중심으로 오른편에 부채꼴 모양으로 뻗어 있는 건물이 하나 있는데, 제10, 11, 12옥사다. 제러미 벤담이 제안한 교도소 형태인 파놉티콘(Panopticon) 구조인데, 그리스 어원 그대로 중앙에서 각 옥사를 쉽게 감시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하지만 죄수는 중앙을 들여다보기 힘든 구조다. 그리고 겨울 감옥이라서 그런지 한기가 서려온다.
12옥사에는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들이 11옥사에는 독재정권 시절 민주화 인사가 소개되어 있는데, 나라의 부흥과 발전을 위해 노력한 사람들을 자기의 권력과 기득권을 위해 탄압한 형무소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1907년에 수감된 의병부터 독립운동가와 민주인사들의 기록이 남아 있는데, 우리나라가 자주와 민주를 위해 너무나 어려운 시련의 길을 걸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내가 누리는 자유는 이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10옥사 내부. 겨울에 들어오니 한기가 서려온다.
옥사 뒤에는 재소자들이 노역을 했던 공작사가 있다. 관공서와 군부대에 필요한 물품을 생산했다고 하는데, 옷감, 의복, 벽돌들을 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하고 나서는 전쟁물자를 생산했는데, 재소자에 대한 구타와 인권유린이 끊이지 않았다.
공작사 북서에 있는 한센병사와 9옥사 사이를 지나면 오른편에 건물이 하나 보이는데, 1922년 형무소 확장 이후 지어진 사형장이다. 최초로 건립된 1908년부터 해방 전까지 확인한 사형집행인원은 493명. 이중 정부로 독립운동을 인정받은 자는 무려 92명이었다. 공인받지 않은 인원까지 합쳐도 무려 27%에 해당한다고.
사형장을 보면 커다란 나무가 쓰러져 있는데, 형장으로 가는 독립투사들이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게 되어 나무를 부여잡고 울었다고 한다. 그래서 ‘통곡의 미루나무’라는 이름이 붙었다. 나무마저도 3년 전 태풍으로 줄기가 뽑힌 채로 누워 있다. 사형장 뒤로는 철문과 어두컴컴한 통로가 보이는데, 사형집행 후 시신을 옮기기 위한 시구문이다.
재소자들이 노역을 했던 공작사
형무소 확장 이후 지어진 사형장. 사형장 앞에는 2020년 태풍으로 뿌리째 뽑힌 미루나무가 쓰러져 있다. 독립투사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 나무를 부여잡고 울었다.
사형장 앞에는 수감자들이 햇볕을 쬐고 간단한 운동을 한 곳이 있는데, 격벽장이다. 내가 봤던 옥사구조와 비슷한데, 역시 가운데에서 간수가 수감자들을 쉽게 감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철거되었는데 2011년에 복원한 것이다.
격벽장 아래에는 또 다른 작은 벽돌옥사가 보이는데,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되었던 여옥사다. 여옥사 8번 감옥에 갇혔던 사람은 유관순. 함께 수감되었던 이는 경기 지역에서 3.1 운동을 주도했던 어윤희, 권애라, 신관빈, 심영식, 김향화, 임명애다.
내게는 뭔가 낯익어 보이는 이름인데, 2019년 3.1절을 기린 노래인 ‘대한이 살았다’ 뮤직비디오에서 본 이름이다. 좁디좁고 열악한 8번 감옥에서 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조선의 독립을 부르짖었는데, 심영식 애국지사의 아드님인 문수일 옹께서 어머니께서 부른 노래를 가사로 적어 새로운 선율에 덧입혀진 것이다. 옥사 내에는 수감된 여성 독립운동가의 사진이 걸린 거울의 방과 여간수의 이야기를 담은 옛 감옥도 있다.
수감자들이 햇볕을 쬐고 간단한 운동을 한 격벽장. 부채꼴로 되어 있는데, 간수가 수감자들을 쉽게 감시하기 위함이다.
통일로로 넘어가는 길에 보이는 독립문. 그리고 붉은 벽돌의 건물인 옛 서대문형무소. 구한 말 독립협회는 중국 사대외교의 청산을 기념하고 자주독립으로 나가자는 의지를 가지고 영은문을 헌 다음 독립문을 세웠다. 국제정세는 조선과 이를 이은 대한제국에 상당히 불리했지만,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우리만의 개선문을 지은 것이 아닐까?
하지만 희망은 오래가지 못했다. 일제가 우리 주권을 뺏으면서 독립을 염원하는 이들을 수감하고 고문했다. 무려 36년 동안. 해방이 되고도 이곳은 독재정권이 민주화 인사를 탄압했던 장소라는 어두운 역사를 이어갔다. 이는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민주국가의 싹을 틔우며 끝을 맺게 된다. 독립문을 완공한 1897년부터 시간을 계산하면 구한말 깨어난 사람들이 바랐던 이상이 이뤄지는 데 걸린 시간은 100년에 가까운 세월이 걸린 셈이다.
너무나 어렵게 시련을 견디며 이뤘기에 독립운동가와 민주열사가 쌓은 공든 탑을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다시는 이런 비극을 반복하지 않고, 행복하고 정의로운 사회의 비전을 보여주는 것이 우리 세대의 몫이 아닐까 싶다.
서대문형무소를 나서며. 독립협회가 꿈꾸었던 자주와 민주운동가가 꿈꿨던 민주주의가 이뤄지기까지는 무려 한 세기에 가까운 세월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