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치나남 Jan 10. 2022

05 도쿄에서의 기억, 몰입 책 읽기의 기쁨

  나는 서른세 살에 처음으로 기숙사 생활을 했다. 늦은 나이였다. 어린 대학생과 함께 다시 학창 시절을 보내게 된 것이다. 부산에서 도쿄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흥분과 설렘으로 가슴이 벅찼다. 대학 때부터 그렇게 바라던 일본 유학이 졸업 후 10년 만에 이루어진 것이다. 

 일본 도쿄 학예대학 대학원 과정에서 일본어 교육을 1년 6개월 동안 수학하게 되었다. 비록 석·박사 코스는 아니었지만, 교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최선의 유학 방법 중 하나였다.

 신주큐역에서 JR 중앙선을 타고 30분 정도 가면 히가시 코가네이역이 있다. 역에서 자전거로 10분 정도 타고 가면 학교가 나온다. 기숙사도 학교 바로 옆에 있었다. 내 방은 1인용 침대 하나, 책상 하나가 들어가면 꽉 차는 크기였다. 좁은 기숙사 방이었지만, 나에게는 신세계였다. 6개월 동안 여기 머문 후, 아들과 함께 생활하기 위해 원룸으로 옮겼다. 그전까지 이곳은 온전히 나만의 소우주였다.     

 한국에서 도쿄 학예대학으로 같이 온 교사는 다섯 명였다. 일본 문부과학성 초청 교사 파견 연수프로그램을 통해 전국에서 모였다. 서울, 대전, 부산, 강원도 등에서 온 교사들로 과목도 수학, 국어, 사회, 일본어로 제각각이었다. 같은 기숙사를 쓰니까 자연스럽게 친해졌고 일본에 도착한 후 한 달 동안은 거의 매일 밤 만났다. 

 한국 학교 이야기, 교육정책에 관한 이야기, 근무했던 학교와 학생 이야기 등 매일 밤 이야기꽃으로 12시를 넘겼다. 다들 10년 이상의 교직 경력으로 한창 교육에 대한 열정과 사명감으로 꽉 차 있었다. 또 각자 살아온 삶의 여정이 달라 달리, 살아온 이야기와 살아갈 이야기로 할 이야기들이 참 많았다. 낯선 타국에서 적응하기 위해 그리고 향수병을 달래기 위해서도 일행은 필요했다.     

 전국의 교사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생각과 학교 환경을 알게 되어서 한국에 있을 때는 알지 못했던 다른 지방의 교육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외국에 나오면 역시 시야가 더 넓어지는 것 같다. 우리끼리 영어, 일어 스타디도 하면서 참 알차게 보냈다.

 한국에서 택배가 오는 날은 파티하는 날이였다. 한국의 지인과 가족이 보내주는 한국 음식은 항상 인기가 좋았다. 한국 과자, 안주, 라면, 고추장 등. 

 유학생들이 일본에 와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성능 좋고 싼 자전거를 확보하는 일이다. 자전거 없이는 생활이 많이 불편하다. 이전에 자전거를 못 탔던 사람도 자전거부터 제일 먼저 배운다. 역까지 나가는 수단이 자전거이기 때문이다. 걷기는 조금 먼 거리이고 버스 타기는 또 모호한 곳이 많다. 일본에서는 노인들 이외에는 대부분 자전거로 통학하고 장을 본다. 

 2002 한일 공동 월드컵 개최로 길거리에 나가면 붉은 악마 T-셔츠와 울트라 니뽄 T-셔츠를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외국인 유학생들은 무조건 한국을 응원해주었다. 한국에 관한 호의가 대단했다. 같은 외국인이라서? 한국 사람이 사교적이라는 것을 나는 일본에 가서 알았다. 우리 민족은 친화력이 정말 뛰어난 민족이다. 30분이면 말을 트고 1시간이 지나면 친구가 된다. 그것도 말도 안 통하는 외국인과. 우리나라의 저력이다.      

 가족 기숙사를 기다렸지만, 경쟁이 치열하여 당첨이 안 되었다. 결국, 원룸을 얻어서 아들과 같이 살게 되었다. 초등학교 2학년인 아들은 일본에서 엄마와 함께 생활한다는 즐거움과 낯섦에 대한 두려움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아들은 일본에 오기 전에 일본어를 한 적이 전혀 없었다. 어릴 때 외국에서 살아보면 좋은 많은 경험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아이를 공립학교 고다이라 초등학교에 보냈다. 

 지금도 생각하면 아들에게 참 미안한 일이 있다.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길을 딱 한 번 같이 데려다주고 아이를 등교하게 한 일이다. 길을 잘 찾아다니고 쉽게 길을 익히는 아이라서 믿었던 것 같다. 항상 큰 아이는 제 또래 아이의 나이보다 한두 살 더 컸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작은 아이는 두세 살 아래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장남, 장녀가 항상 힘든 건 아닐까? 부모는 아직 철이 안 들었고, 큰 아이에게 기대는 크고.      

 아이는 일본에서 3개월 동안 수업시간에 듣기만 한 것 같았다. 좋아하는 축구로 친구가 생기고 축구를 통해 조금씩 학교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또래 친구가 생기니 조금씩 일본어도 할 수 있게 되었다. 3개월이 지나니 폭발적으로 일본어가 느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 이후 6개월이 지나고부터는 수업 진도를 따라갔다.

 한 학기가 끝나고 학습 결과물로 무를 손에 들고 왔다. 자신이 키운 것이라고 했다. 참 신기했다. 한 한기 동안의 학습 결과물로 ‘무우’를 들고 온 것이다. 

 아이가 다닌 학교의 교실은 문을 열면 바로 텃밭이 있었다. 한 학기 동안 아이들은 씨를 뿌리고 물을 주면서 식물을 키운다. 키우는 식물을 관찰하면서 자연스럽게 이과 공부를 하는 것이다. 텃밭으로 식물을 가꾸고 자기 식물을 통해 책임감과 생명존중의식을 배운다.

 나는 첫째 아이가 두세 살이 되었을 때부터 많은 책을 읽어 주었다. 최선을 다해 읽어 준 기억이 난다. 그 영향이었을까? 어느 날 담임으로부터 아들이 교내 동화 상상 그림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심사과정에서 외국인에게 최우수상을 주어야 하느냐에 관한 논의가 있었다고 하였다. 학교 대표로 고다이라시 시청에 작품이 전시되고 마이크로필름으로 저장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뻤다. 

 일본에서 그 나라 아이들을 제치고 최우수상을 받게 된 점도 고마웠지만, 수업 내용을 이해하고 동화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이 대견했다. 가슴이 뭉클했다.      

 황논문 교수의《몰입》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몰입 상태에서는 한 가지 목표를 위하여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 능력을 발휘하는 비상사태가 발동한다. 자신을 초긴장 상태로 만들어 모든 것을 잊고 오로지 한 가지 일에 집중하기 때문에 잠재된 능력을 최대로 발휘하는 것이다.”     

 무아지경이 된다는 것이 이런 몰입 상태라고 생각한다. 고도의 집중된 상태는 우리 뇌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문제 해결을 쏟는 데 온 힘을 기울인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완전히 쥐어짜는 것이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내가 생각도 못 한 결과가 만들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몰입의 즐거움》의 작가 칙센트미하이는 몰입을 쉽게 하기 위해서는 첫째, 목표가 명확해야 하고 둘째, 일의 난이도가 적절하고 셋째, 결과의 피드백이 빨라야 한다고 한다. 나는 이 세 과정을 교원임용고시 준비, 일본문부과학성 파견교사 선발 준비, 교육전문직 선발 시험에서 그 과정을 거쳤다. 

 몰입하게 되면 집중력이 상승하고 그 과정에서 Flow를 느끼며 기쁨이 나의 몸을 감싸는 경험을 몇 차례 했다. 그 이후 일단 어떤 과제가 주어 지면 2~3주 시간을 확보한다. 

 예를 들면 강연원고, 소논문, 프로젝트 등의 요청이 있으면 관련 책 읽기에 완전히 집중하여 몰입한다. 그러면 뇌 속에서 기존 알고 있던 지식과 경험이 새로 들어온 지식과 연결, 융합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끊임없이 떠오른다. 

 일본어 공부도 몰입과 집중을 통해 단시간에 비약적으로 실력을 쌓은 경우이다. 하나에 한가지씩 집중적으로 에너지와 시간을 투입하는 것이다.      

 일본 학교생활에 적응하는 과정에 있는 아이를 통해서도 이 몰입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완전히 그 세상에 빠져서 적응하려고 뇌가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하는 것 같았다. 그만큼 아이에게는 그 시간을 견뎌내는 힘겨움도 있었다. 그 과정을 극복만 한다면 이전에는 상상도 못 했을 성과가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짧은 기간에 집중적인 몰입을 통해 초 2학년 학습을 따라가고 학기 말에는 학예제 발표회 때 주인공 역할까지 하게 되었다. 

 아이가 나와 같은 몰입을 통해 어학을 배우고 일본 생활에 적응하는 것을 지켜보게 된 것이다. 일본에서 1년이라는 짧은 체류 동안 히라가나도 모르던 아이가 현지 수업을 따라가고 또래 집단 아이와 어울리면서 리더역할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칙센트미하일 박사는 “깊이 생각하고, 여유 있게 생각하고 지속해서 생각하면 그 생각에 빠지게 된다. 뇌는 몰입을 좋아하므로 어느 순간 나에게 영감과 직감을 준다. ”라고 말한다.

 온종일 그 생각을 하고 관련 지식과 정보를 투입하면 어느 순간, 뇌가 ‘아하~! 라고 문제를 풀 수 있는 답을 주는 것이다. 문제해결력과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생기는 것이다. 

 내가 아이를 데리고 일본에서 살아남기 위해 책과 생존에 몰입한 시기는 나와 아이를 폭발적인 성장으로 이끌었다. 책 읽기와 생존력에서도 집중과 몰입의 시기였다. 그때 1년 6개월 동안 읽었던 책 들이 그 이후 내 인생의 자양분이 된 것이다. 

 아이도 도쿄 생활을 통해 일본어뿐만 아니라 낯선 환경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운 값지고 알찬 시간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수영하는 아이, 책 읽는 엄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