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3시, 콜롬비아 드립커피
오늘은 오후부터 서늘한 바람이 분다. 옷을 여미고 문을 닫았다. 따뜻한 커피잔을 들고 가만히 밖을 내다보다가 문득, 한 손님이 생각났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오후, 카페에 들어온 한 남자 손님이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 ‘와, 저렇게 잘생긴 사람을 살면서 내가 본 적이 있던가?’ 속으로 감탄하는 동안 손님은 주문을 마치고 제일 안쪽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는 주문을 확인하고 커피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따뜻한 콜롬비아 드립 커피.
전기포트에 물을 올리고 주전자를 바라보다가, 기억이 났다. 엊그제 본 드라마에 나온 사람이다. 주인공은 아니고 형사역의 주연 옆에 있던 보조 형사 역할이었다. 스치듯 등장했고 한 두 마디 대사가 다였지만 눈빛이 기억에 남는 배우였다.
일단은 커피를 내리는데 집중하기로 했다. 맛있게 내려서 단골로 만들리라! 갈려진 원두 위에 물을 부었다. 카페 안에 향긋한 오렌지빛 커피 향이 퍼져나갔다. 산미가 두드러지는 콜롬비아 원두다. 이런 커피는 확실하게 취향이 갈린다. 나야 커피에서 만큼은 편식 없이 골고루 좋아하기 때문에 기분에 따라 즐기지만 커피에서 과일향이나 신맛이 나는 걸 싫어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그리고 사실은 싫어하지만 좋아하는 척하는 사람들도. 그럴 필요 없는데, 커피는 순전히 취향인 것을. 고소하고 묵직한 커피를 좋아한다고 후진 테이스트를 가진 게 절대 아니다. 나도 매일 마시는 커피는 고소하고 연하게 타서 마신다. 하지만 가끔 새로운 원두가 도착했을 때 혼자 드립커피를 내려먹다가 눈을 질끈 감고 감동에 빠진 적이 몇 번 있다. 드립커피를 좋아하는 우리 손님들은 자주모습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아마도 한 번씩 ‘좋은’ 커피를 여유롭게 즐기고자 방문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들은 올 때마다 행복해진 표정으로 돌아가곤 한다. 난 그거면 충분하다. 매일매일 비싼 드립커피가 몇 십 잔씩 나가지 않아도 괜찮다.
아무튼 이 남자손님은 드립커피를 즐겨마시는 사람인 것 같다. 주문할 때부터 산미가 가장 강한 커피를 찾았다. 완성한 커피를 서빙했다.
“맛있게 드세요. 식으면서 산미가 점점 더 잘 느껴지실 거예요.”
“향 좋네요. 감사합니다.”
친절하고 목소리도 좋았다. 이 사람 앞으로 아주 유명한 배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맘속으로 빌었다. 커피 머신 너머로 슬쩍 보니 뭔가 읽고 있는 것 같아서 선곡에 신경을 좀 더 쓰기로 했다. 가사가 없는 피아노 연주곡을 위주로 틀었다. 한가한 시간이었다. 나는 몇 달째 같은 페이지에 머물렀던 책을 다시 펼쳐 읽기로 했다. 중간중간 테이크아웃 주문 서너 개를 받고 나니 두어 시간 정도 흘렀나? 손님이 슬슬 나갈 채비를 했다. 깨끗하게 비운 커피잔을 돌려주며 이야기했다.
“잘 먹었습니다. 너무 오래 있었죠?”
“아니에요. 원래 이 시간이 좀 한가해서 조용하게 있기 좋죠.”
“감사합니다. 또 올게요.”
“안녕히 가세요.”
그 이후에도 몇 번 카페에 들러 두 어시간 있다 가곤 했다. 그리고 한동안 다시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아쉬웠지만 그 사이에 새로운 단골도 생기고 카페도 바빴다. 추억에 잠겼다가 나는 오랜만에 책 정리를 하려고 카페에 있는 작은 책장을 살펴보았다. 어? 못 보던 책이 꽂혀있다. 언제일까, 누구일까? 어제 책장 앞에 서성이던 사람일까? 꽤 유명한 책이라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작가의 얼굴이 나온다. 어제 온 여자손님이 맞다. 못 알아본 게 괜히 미안해졌지만 책을 두고 간 것이 이내 귀엽다고 생각했다. 책은 다시 그 자리에 꽂아두었다. 카페에는 이름 모를 사람들이 다녀가는 익명의 공간이다. 그런데 가끔은, 이름을 들으면 누구나 아는 사람들도 다녀간다. 나를 알지만 나는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은 마주하며 사는 건 어떤 기분일까? 어쩌면 나도 비슷한 삶은 사는 게 아닐까 살짝 건방진 생각을 하니 피식 웃음이 났다.
지나가서야만 알아차리는 계절, 우린 모두 가을 한가운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