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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 평화방송에서 그대를 생각하다

cpbc 평화방송 <이웃집 라디오> 초대 방송을 마친 날의 기록

by 시니어더크


오늘은 조금 특별한 날이었다. 오래전 아내와 함께 걸었던 명동 거리를 다시 걸었다.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이제는 가늠조차 되지 않지만, 이상하게도 오늘은 그곳으로 발길이 향했다. 그저 마음을 다잡고, 잊힌 기억을 되살려 보고 싶었다. 세월은 명동의 얼굴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거리의 간판은 절반이 영어로 바뀌어 있었고, 사람들의 얼굴에는 낯선 피부색이 섞여 있었다. 상점 앞을 스쳐 지나갈 때마다 들려오는 외국어 인사말이 이곳이 서울인지, 아니면 뉴욕의 어느 거리인지 혼란스럽게 했다. 선글라스를 쓰고 카메라를 들고 걷는 내 모습을 보고 누군가 외국인이라 생각하지는 않을까, 그런 엉뚱한 생각이 스쳤다. 그러다 문득, 예전의 명동을 함께 걷던 그녀의 웃음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났다.


명동 거리


예전 우리가 자주 들르던 명동칼국수집도, 2층 레스토랑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아니면 내가 그 자리를 잊은 걸까. 문득 들어선 약국에서는 사람들이 바구니를 들고 약을 고르고 있었다. 마치 마트의 진열대 앞에 선 듯한 풍경이었다. 약을 골라 담는 시대라니, 그 변화가 낯설면서도 신기했다. 그녀가 곁에 있었다면, 분명 그 장면을 보고 눈웃음을 지었을 것이다.


롯데타운


미도파백화점이 있던 자리는 이제 롯데백화점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미 오랜 전에 바뀌었을 것이다. 거리에는 벌써 크리스마스 장식이 반짝였고, 사람들의 걸음에서는 연말의 들뜬 기운이 흘렀다. 반짝이는 트리와 전구 불빛이 쏟아지는 거리 한복판에서 나는 걸음을 멈췄다. 그 순간 아내가 떠올랐다. 크리스마스라면 언제나 우리 가족이 함께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고, 집으로 돌아와 케이크 위에 촛불을 켜고 아이들과 함께 웃던 그 시절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 웃음과 촛불의 온기가 지금도 내 마음속에 남아 있다. 다만, 이제는 그 자리에 그녀가 없다는 사실만이 모든 것을 다르게 만들었다.


명동성당


명동에 온 김에 꼭 들러야 할 곳이 있었다. 명동성당이었다. 오랜만에 계단을 오르자 붉은 벽돌 사이로 부드러운 햇살이 스며들었다. 성당은 기억보다 작고 소박했지만, 그 소박함이 오히려 따뜻했다. 아마도 로마의 웅장한 대성당들을 보고 온 탓에 그렇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는 로마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고요와 평온이 있었다. 오래된 벽돌 사이에 깃든 사람들의 기도와 시간의 향기, 그리고 믿음의 숨결이 나를 감쌌다. 아내가 있었다면 한참을 서서 함께 바라보았을 것이다.


평화방송 사옥


사실 오늘 명동을 찾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평화방송 라디오 인터뷰 때문이었다. 브런치에서 내 글을 읽은 '봄아범' 작가이자 평화방송 아나운서인 그분이, 방송에 초대하고 싶다며 연락을 주었고, 나는 약속된 시간에 맞춰 영락교회 앞에 있는 평화방송 건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밝은 미소로 나를 맞아준 이는 신의석 PD였다. 젊고 온화한 인상이 인상적이었다.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웃음이 났다. 내 고향 "충청북도 중원 군 신니면 신청리 신의실"과 발음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운명 같은 이름이네요." 내가 농담처럼 말하자 그는 호탕하게 웃었다. 그 웃음 덕분에 낯선 스튜디오의 공기가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편하게 말씀만 해주시면 됩니다." PD의 말이었지만, 마음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나는 글로는 많은 말을 하지만, 마이크 앞에 서면 언제나 낯설다. 그러나 막상 인터뷰가 시작되자 이야기는 자연스레 흘러갔다. "선생님은 어떻게 매일 아내에게 편지를 쓰실 수 있나요?" PD의 질문에 잠시 숨이 막혔다. 그 말 한마디가 내 기억의 문을 두드렸다. 의정부 성모병원, 싸늘한 두 볼, 마지막으로 감싸 쥐던 손, 그리고 그날의 약속이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아내가 하늘나라로 가더라도, 나는 매일 밤 당에게 편지를 쓰겠노라고, 당신은 내 마음속에서 영원히 살아 있을 거라고, 그렇게 맹세했었다. 그 약속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신의석 PD님 (아나운서) 과 한 컷


그 약속을 지키며 살아온 시간이 어느덧 1년이 되어간다. 아내가 떠난 자리에 여전히 바람이 불지만, 그 바람 속에는 그녀의 숨결이 섞여 있다. 그래서 나는 매일 밤, 식탁 위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그녀에게 말을 건다. 아무 말도 들리지 않지만, 마음은 분명 대화를 나누고 있다. "오늘 하루도 잘 지냈어요?" 그 짧은 인사가 내 하루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PD는 내게 또 물었다. "아내를 떠올리며 매일 글을 쓰는 이유가, 단순한 그리움 때문만은 아니겠지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보고 싶고 외로운 것은 물론이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미안함 때문이었다. 그녀가 떠나고 나니 그동안의 잘못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지만, 가끔은 피로와 지침 속에서 간병을 완벽히 해내지 못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그때마다 죄스러움이 마음을 파고들었다. 그래서 매일 밤, 그 미안함을 글로 풀어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내 마음속 눈물을 글로 녹이며 살아온 시간이었다.


그는 또 물었다. "자녀분들이 선생님을 참 존경할 것 같습니다. 스스로는 어떤 아버지라고 생각하세요?" 나는 잠시 웃었다. "글쎄요, 좋은 아버지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아이들과 함께했던 시간만큼은 누구보다 소중했습니다. 생일이면 케이크를 자르고, 특별한 날은 빠짐없이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죠. 하지만 아내가 긴 세월 병과 싸우는 동안 아이들이 마음껏 웃지 못했던 게 늘 미안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나는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제 두 아이 모두 결혼할 나이는 훌쩍 지났지만, 아직 인연을 만나지 못했다. 그 사실이 부모의 마음으로는 늘 아리다. 언젠가 아이들이 자신을 진심으로 아껴주는 사람을 만나 따뜻한 가정을 이루길 바랄 뿐이다. 그녀 역시 병상에서도 늘 그 이야기를 했다. "우리 애들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그녀의 그 말이, 지금도 내 마음 한편에 살아 있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에게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집 같은 아버지, 조용히 등을 두드려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스튜디오 안에서


"행복한 추억이 있다면요?" PD의 질문에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는 병원으로 데이트 다녔죠." 그 말에 PD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내가 힘들어 보일 때면, 그 말을 하면서 "병원으로 데이트하러 오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그렇게 농담을 던지면, 그녀는 고통 속에서도 방긋 웃었다. 그 웃음 하나면 하루의 피로가 녹아내렸다. 몸이 잠시 회복될 때는, 짬을 내어 일본 교토와 오사카를 다녀오기도 했고, 한 번은 스페인으로도 여행을 떠났다. 바르셀로나, 그라나다, 세비야, 마드리드…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 푸른 정원에서 그녀가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여보, 여기는 정말 천국 같아요." 그 한마디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고, 그 따뜻한 손끝의 온기가 지금도 내 손안에 남아 있다.


"간병으로 보낸 13년, 이제는 여유가 생기셨을 텐데 앞으로 어떤 시간을 살고 싶으세요?" 질문이 이어졌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13년은 내 인생의 전부이자 배움의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시간이 끝나니 처음엔 너무 낯설고 막막했습니다. 하루 종일 해야 할 일이 사라지고, 조용한 집에 혼자 앉아 있으면 시간이 멈춘 듯했죠. 하지만 그 침묵 속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때부터 다시 노트북을 열었습니다. 그녀가 내게 가르쳐준 사랑과 인내의 의미를 세상과 나누어 보고 싶었습니다."


지금 나는 글을 쓰고, 책을 준비하고, 한편으로는 오래 미뤄왔던 부동산 경매 공부를 다시 시작하며 현장을 뛰고 있다. 때로는 여행을 하며, 때로는 글을 통해 세상과 대화한다. 그리고 믿음 안에서, 주어진 하루를 감사히 살아가고 있다.


스튜디오 안에서


죽음에 관한 질문이 이어졌다. "선생님은 어떤 죽음을 맞이하고 싶으신가요?"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오는 일이죠. 하지만 이제는 담담히 말할 수 있을 만큼 나이를 먹은 것 같습니다. 믿음 안에서 평온하게, 감사한 마음으로 그 시간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아내를 떠나보내며 깨달았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주님께서 부르시는 또 다른 시작이라는 것을요. 언젠가 나도 부르심을 받는다면, 아내가 먼저 가 있는 그곳으로 미소 지으며 걸어가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 하루를 단정히 가꾸며 살아가려 합니다. 사랑을 베풀고, 감사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일, 그것이 나의 마지막 준비입니다."


오늘 내가 출연한 방송은 평화방송 라디오 '이웃집 라디오'였다. 이웃이란 무엇이라 생각하냐는 질문에 나는 말했다. "이웃이란 꼭 옆집에 사는 사람만이 아닙니다. 브런치와 블로그에 글을 올리며 수많은 이웃을 만났습니다.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어도 내 글을 읽고 공감해 주고, 따뜻한 댓글로 마음을 건네는 분들, 그분들이 내게 진짜 이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제 방송을 청취하게 될 분들도 역시 제 이웃입니다. 서로의 삶을 이해하고 마음을 나누는 그 순간, 우리는 이미 좋은 이웃이 되어 있으니까요."


마지막 순서로 PD가 노래 한 곡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이선희의 '인연'을 말했다. 아내가 가장 좋아하던 노래였다. 투병 중에도 이 노래가 들리면 가만히 눈을 감고 따라 부르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노래는 우리 둘의 인연을 닮아 있었다.


봄아범 작가님 (김지현 아나운서)과 한 컷


그렇게 방송을 마친 뒤 PD와 사진을 몇 장 찍고 스튜디오를 나서려는데, 봄아범 작가님인 김지현 아나운서가 붉은 셔츠 차림으로 들어왔다. 짧게 한 컷을 남겼다. 브런치에서 보던 프로필 사진과 똑같은 미소였다. 품격 있고 따뜻한 목소리가 인상 깊었다. 순간, 아내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예전에 형부의 형님께서 "조금만 일찍 알았더라면 성우로 키워줬을 텐데" 하시던 그 말이 생각났다. 그분은 KBS 방송국 국장님이셨고 이미 은퇴한 분이셨다. 만약 아내가 성우가 되었다면 세상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았겠지만, 대신 나는 그녀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인연이란 결국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명동을 떠나는 길, 오후 세 시의 햇살은 따뜻한 금빛으로 거리를 감싸주고 있었다. 그 빛 속에서 내 마음에는 오직 아내의 미소만이 고요히 머물러 있었다. 라디오 방송이 나갈 날이 다가온다. 오는 토요일, 11월 8일 오후 6시~7시 사이, 평화방송 라디오 FM 105.3㎒, 스마트폰에서 'cpbc 플러스' 앱을 내려받으면 방송을 들을 수 있다. 짧은 인터뷰였지만, 그 안에는 아내와 함께 걸어온 세월과 사랑, 그리고 그녀를 향한 그리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비록 목소리로 전해지지만, 그날의 이야기가 전파를 타고 하늘 끝까지 닿을 것만 같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마음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스튜디오 안에서 아내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목이 메었고, 짧은 침묵이 찾아올 때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그 침묵은 슬픔이 아니라 감사였다. 그 순간만큼은 아내가 내 곁에 앉아 내 이야기를 함께 듣고 있는 듯했다. 방송이 나가는 날이면, 나는 라디오 앞에 조용히 앉아 내 목소리를 통해 다시 그녀와 마주할 것이다. 전파를 타고 흐르는 그 이야기 속에서, 아내도 나를 알아보고 미소 지을까. 그날,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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