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계절을 준비하는 마음
퇴원하던 날, 병원 현관문이 열리자 차갑고 맑은 공기가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몇 밤을 지새우며 머물렀던 입원실의 무거운 공기와는 전혀 다른 냄새였다. 아내는 오랜만에 바깥공기를 깊이 들이마셨고, 나는 그녀의 걸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조심스레 곁을 지켰다. 차에 올라 집으로 향하는 동안,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던 풍경은 유난히 선명해 보였다. 긴 시간을 건너온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듯한 묘한 밝음이 그 풍경 속에 머물러 있었다.
집 문을 열자 익숙한 따뜻함이 천천히 우리를 감싸왔다. 병실의 냄새가 옷깃 사이에 남아 있었지만, 집 안의 공기는 그 냄새를 조금씩 밀어내는 듯했다. 아내는 소파에 조심스레 앉아 숨을 고르고, 나는 창문을 열어 바람을 들였다. 가을빛은 여전히 방 안 깊숙이 스며 있었고, 우리는 그 빛을 바라보며 아주 길고도 조용했던 십여 일의 시간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며칠 동안 아내의 하루는 작은 움직임들로 이루어졌다. 식탁 의자에 잠시 앉는 일, 베란다 문턱을 넘는 일, 계단을 한 칸씩 내려오는 일. 늘 하던 동작이었지만, 다시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었다. 아내는 자신의 몸을 천천히 읽어가듯 움직였고, 나는 그 속도에 맞춰 옆을 지켰다. 회복의 시간은 그렇게 아주 느린 리듬으로 흘러갔다.
여유가 조금 생기자 우리는 가까운 공원으로 짧은 산책을 나갔다. 바람이 부는 방향에 따라 아내의 걸음이 잠시 멈추기도 했지만, 그 멈춤조차 오랜만에 되찾은 일상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햇빛 아래 선 아내의 얼굴은 예전보다 조금 더 단단해 보였고, 나는 그 모습을 마음속 깊이 새기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 아내의 기력이 더해지자 우리는 더 먼 곳으로 나가보기로 했다. 오랜 병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려는 마음이었을까. 짧은 일본 여행을 떠났다. 비행기 창밖으로 펼쳐진 구름은 놀라울 만큼 고요했고, 아내는 그 하늘을 한참 바라보았다. 교토의 오래된 골목을 걷고 작은 찻집에 들러 차를 마시는 동안, 우리는 잊고 지냈던 여행의 자유를 다시금 느꼈다. 아내는 풍경 앞에 오래 머물렀고, 나는 그 곁에서 그녀가 다시 살아가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도 몇 해 동안 큰 탈 없이 지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우리는 집 근처를 함께 걸었고, 아내의 몸도 안정된 듯 보였다. 다만 아주 가끔, 말없이 스쳐 지나가는 작은 신호들이 마음속에서 일렁였다. 피로가 더 오래 이어지는 날이면 나는 아내의 손을 살며시 잡았고, 아내는 "괜찮아요. 아직은 좋아요."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 말은 늘 깊고 따뜻한 안심이 되었다.
우리의 삶은 그렇게 조용하게 이어졌다. 회복이 눈에 보이는 날도 있었고, 설명하기 어려운 작은 불안이 스며드는 날도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둘이 함께 있는 한 어떤 순간도 견딜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그것은 병이 남기고 간, 말 없는 선물 같은 마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우리가 지나온 시간은 결코 끝이 아니라 또 다른 문턱이었다는 것을. 열흘이라는 고비를 넘기고 계절의 흐름 속에서 회복을 되찾으며, 아내가 다시 일어서는 모습을 지켜보는 동안 우리는 모든 것이 원래 자리로 돌아온 것만 같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인가 마음 한켠에 아주 얇고 작은 그림자가 서서히 내려앉기 시작했다. 불안이라기보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던 순간들이 언젠가 또 찾아올 수도 있다는, 삶이 가진 근원적인 불확실성에 대한 조용한 자각이었다.
아내가 아침 햇살 아래에서 잠시 숨을 고를 때도, 공원 벤치에서 바람을 맞으며 눈을 가늘게 뜨고 쉴 때도, 나는 설명하기 어려운 미세한 떨림을 느끼곤 했다. 깊은 바다 아래에서 낮은음이 은근하게 울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우리에게 말을 거는 듯한 순간들이었다. 회복이라는 말이 주는 안도감이 익숙해질수록, 그 안도감 뒤편에 숨어 있는 또 다른 결을 함께 배워야 한다는 사실도 느껴졌다.
긴 고통을 지나 다시 일상을 되찾았다고 해서 앞으로의 길이 언제나 평탄하다고 믿을 수는 없었다. 병이 남긴 흔적은 몸뿐 아니라 마음에도 빛과 그늘을 동시에 새겨 놓았고, 우리는 그 두 가지를 함께 품은 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내가 잠시 피곤해 보이면 나는 자연스레 발걸음을 늦추었고, 그녀의 작은 몸짓에도 시선을 조심스레 두곤 했다.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함께 지나온 시간이 남긴 배려이자 응시였다.
우리가 지나온 시간은 끝난 이야기가 아니라 앞으로의 날들을 밝혀줄 작은 등불처럼 가슴속에서 은은히 타오르고 있었다. 지나온 고통이 우리 삶을 바꿔놓았지만, 그 바뀐 삶 속에서 우리는 더 단단해졌고, 서로를 바라보는 마음도 더 깊어졌다. 그래서 나는 그날 깨달았다.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야말로 다시 시작되는 또 하나의 문턱이며, 앞으로 다가올 계절과 고비 또한 그 문턱 너머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는 사실을.
그럼에도 나는, 그리고 아내는 알고 있었다. 앞으로 어떤 계절이 오든 어떤 고비가 찾아오든 결국 서로의 손을 잡고 걸어갈 것이라는 믿음을. 지나온 시간 속에서 우리가 배운 것은 불안과 고통의 한가운데에서도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버텨낼 힘이 생긴다는 단순하지만 깊은 진리였다. 그 진리는 앞으로의 길에서도 변함없이 우리를 지탱해 줄 터였다.
그래서 이 글의 끝은 진짜 끝이 아니었다. 다음 계절을 조용히 준비하는 자리였고, 지나온 날들을 천천히 정리하며 다가올 시간에 마음을 여는 잠시의 숨 같은 순간이었다. 우리는 이미 많은 계절을 견뎌왔고, 앞으로도 또 다른 계절이 우리 앞에 놓일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불확실함조차 두렵지 않았다. 그 모든 시간을 결국 함께 지나갈 수 있다는 믿음이 우리를 조금 더 단단하게 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어느덧 또 하나의 문턱 앞에 나란히 서 있었다. 그 문턱을 넘기기까지 우리가 딛게 될 한 걸음 한 걸음은, 다시 시작될 다음 이야기를 조용히 예고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