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여름 수영을 떠올린 건 카페에서 읽은 어떤 책으로부터였다. 나는 습관적으로 생의 좋지 않은 기억을 훨씬 더 빠르고 자세히 떠올리곤 하는데, 제주의 수영을 이야기하던 책에서는 문득 좋은 추억이 되살아났다. 제주를 기억할 여유도 없던 계절에.
더운 7월이었다. 대학 시험과 고등학교 졸업까지 마치고 놀 일만 남았던 그해 방학, 가장 친했던 친구들과 어른 하나 없는 첫 비행기를 탔다. 극강의 계획형과 극강의 충동형, 그리고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셋이 떠나는 제주도였다. 우린 열불이 날 만큼 더운 제주에서 숱하게 신경전을 벌이고 언제나 그렇듯 비슷한 구도로 싸웠지만, 대체로 잘 맞았고 자주 행복하다 말했다. 사실 10년을 넘게 우린 항상 그런 구도로 지냈다.
그날은 서울로 올라가기 전 마지막 오후였다. 새벽 비행기를 끊어놓았고, 마지막 날에도 원 없이 놀아야 속이 편했던 셋은 일찍부터 짐을 싸 숙소를 나왔다. 작은 식물원을 구경하고, 카페를 두 곳이나 가고 이중섭 거리를 도는 코스의 마지막은 바다였다. 당시 셋 중 아무도 면허가 없었고, 때문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느끼며 제주도의 택시 기사님과 시시콜콜한 이야길 나누는 여행이었다. 그날도 택시를 타고 카페에서 바다로 향했다. 바다는 가파른 언덕을 걷고 걷다 보면 요새처럼 둘러싸인 천연수영장이 나오는 곳이었다. 오고 가는 파도 사이로 그 봉우리 몇몇에만 바닷물이 고여있었다.
애당초 여행을 계획할 때부터 수영은 하지 않겠다고 했던 우리의 옷차림은 전부 얇은 원피스였다. 바닷바람이 밀려올 때마다 수도 없이 펄럭이는 옷자락을 쥐고 바다를 향해 긴 길을 걸었다. 영화 한 프레임으로 써도 손색이 없을 만큼 아름다웠던 숲과 빛, 그리고 그 옆에 놓인 푸른 바다.
길을 지나 바다까지 내려가 보니 이미 꽤 많은 사람이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높은 바위까지 올라가서 누가 먼저 다이빙을 하냐는 걸 두고 쉴 새 없이 떠들던 대학생 무리와 발만 담근 채로 이야기를 나누던 커플까지. 적당히 소란스럽고 또 적당히 고요했던, 음악보다 아름다운 바다의 소음이 있었다. 샌들을 신은 채로 바닷물에 조심스레 발을 담갔다. 고여있어 따뜻해진 바닷물에 마음이 녹았다.
가만히 앉아 내일이면 보지 못할 풍경을 눈에 담다가, 갑자기 물에 들어가고 싶어졌다. '그냥'이 이유인 순간이 있으니까. "들어가고 싶지 않아?" 하고 정적을 깨자마자 모두의 눈이 흔들렸다. 서서히 바다에 몸을 담그는 날 따라 J가 함께 바다로 들어왔다. 그 바다는 인생에서 가장 따뜻했다. 금세 가슴 깊이까지 물이 찼고, 원피스는 자꾸 둥실둥실 올라왔다. 서로의 원피스를 머리끈으로 묶어주고 신이 난 우리는 바닷속 높은 바위에 앉아서 아직도 깨끔발로 발을 담그던 Y에게 빨리 들어오라고 재촉했다. 처음엔 옷 젖기 싫다며 계속 사진만 찍어주던 Y도 그런 우리가 부러웠는지 10분도 채 안 왜서 우리 옆까지 왔고, 세 원피스가 물살에 섞였다. 그 느지막한 여름 오후는 찬란하고도 자유로웠다.
함께 수영하고 물장구치던 셋의 결말은 몇 시간이고 오지 않는 버스와 택시 기사님께 양해를 구하며 수건 한 장씩 깔고 숙소에 돌아온 것이었지만, 양옆으로 야자수가 펼쳐진 사람 없는 도로에서 걱정 없이 춤추던 그날의 우리가 있었다. 앞으로는 다 모르겠고, 우선 라라랜드 배경 같은 이곳에서 우리만의 영화를 즐기자던 순간을 그곳에 두고 왔다.
이 추억이 이제야 불쑥 떠오른 이유는 그 후로 걷잡을 수 없이 커진 Y와의 관계 때문이었던 것 같다. 너무 비슷해서 너무 달랐던 우리는 처음 만났던 초등학교 시절부터 줄곧 서로에게 삐지고 싸우곤 했다. 가까이 살고 있어서 회복되었고, 항상 중간 다리 역할을 해주던 J가 있어서 풀어졌고, 드문 취향을 가진 공감대가 어김없이 이 사이를 이어주었지만, 애증의 관계라는 건 돌이킬 수 없는 곳에 지름길을 만들기도 한다. 이제 서로가 가게 될 길은 너무 달라졌고, 그럼에도 너와 나를 좋다고 여겼던 많은 것까지 바뀌었다. 끈질겼던 십 년을 보낸 지금은 그 친구와 연락을 끊은 지 오래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절연을 마음먹게 한 사람이 다름 아닌 가장 친했던 십년지기 친구라는 사실이 아직도 가끔 기분을 이상하게 한다. 이를테면 함께여서 좋았던 추억을 꺼내어보아야 할 때, 매일같이 함께였던 갤러리의 가장 오랜 사진의 스크롤을 내릴 때. 결국은 나의 추억을 말하면서도 그 안엔 항상 Y가 있고 그걸 보려면 늘 말하지 않아도 깊었던 우리의 갈등과 그럼에도 좋았던 감정이 양끝에 서있는 걸 봐야 했다. 내색하지 않고 그를 버텨오던 내가 어떤 계기를 이유로 이젠 도저히 못 하겠다고 J에게 울며 전화했던 그날, 우리 셋의 관계는 공식적으로 깨어졌다. 그리고 더 이상 함께 원피스 차림으로 수영하던 세 사람으로 다시 바다를 찾을 일은 없어졌다.
아직도 가끔 Y와의 관계를 떠올린다. 이미 깨진 관계를 자꾸만 살피는 일은 낯설고 고통스럽다. 다시 돌아가도 똑같은 선택을 했을 거라 단언하면서도 수 해를 함께 몸 닿으며 지내오던 사람을 완전한 과거로 끌어내린다는 건 여전히 어렵다. 그래서 아직도 그날의 제주 바다를 떠올리면 '그때라면 여전히 함께인 우리일 수 있었을까'하는 때 지난 후회를 한다. 묻어두기보다 차라리 스스럼없이 속상함을 꺼낼 수 있는 우리였다면, 하는 세월 지난 미련을. 지금 떠올리는 여름의 제주 바다는 자꾸 슬픈 상념까지 불러온다.
글을 쓰면서도 문득문득 울고 싶어졌다. 글을 쓰다 보면 자꾸 힘들었던 순간은 잊고 행복했던 우리만 걸러진다. 추억이라는 게 그렇게 어렵다. 하지만 다시 삶을 돌릴 수 있어도 우린 꼭 거기에 함께 갔을 거다. 같이 제주의 바닷물을 맞고, 같이 기뻐했을 거다. 돌이킬 수 없다 해도 같은 선택으로 같은 결말을 보냈을 테다. 그러니 그때가 부쩍 떠오르는 날엔, 똑같은 원피스를 입고 똑같은 길을 걸어야지. 결말을 알아도 똑같은 일을 저질러 버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