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 가능한 글을 위해

  삼키는 버릇이 생겼다. 풀어내기보다 몸 안에 가득 욱여넣는 방식으로. 그러다 보니 글이 도저히 흘러나올 구멍이 없었다. 애진즉 땜질한 구멍을 다시 뚫을 재주도. 

  글은 희망이라고 말하던 때가 있었다. 자주 쓰면서 감정을 정리했고 그건 노트 한쪽에든 휴대폰 메모장에든 어딘가에 차곡차곡 남았다. 깊은 글은 한 번 적은 이상 다시 꺼내어보지 않았지만, 그저 유형의 물질로 남아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한 위안이 됐다. 언제부터 인간이 뭔가를 계속 남기고 싶어 했을까, 종종 생각하면서. 쓴다는 건 해방이었고, 달팽이 집 같은 안락이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새로운 노트를 사 들고 돌아올 때면 잠시 숨을 수 있는 집이 하나 더 생긴 것 같아 한결 가벼워졌고,  쓸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이 생기면 여기에는 무얼 쓸까 하는 재밌는 고민이 늘었다.

  쓰는 일을 정체성이라고 느낄 즈음에, 작업에 대한 로망을 한껏 안고 상해에 들어갔다. 힘든 유학생활을 예상했지만 누구도 못 가져본 삶을 글로 쓸 수 있게 된 것이니 그 특수함은 큰 힘이 될 거라고 위안했다. 글은 내가 기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행위였고, 그 일과 함께라면 어디서든 잘 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가끔 삶은 우리를 완벽히 배신한다. 그리고 슬프게도 혼자로 가득한 낯선 외국에서 그 사실을 처음 체감했다. 로망 하나로 살아가기엔 바닥보다 더 아래의 삶이 있었다. 대리석의 차가운 방바닥에 앉아 마치 마음처럼 널브러진 수많은 짐을 보면서 나는 '종일' 울었다. 며칠 사이에 방 밖을 나가는 것조차 많은 다짐을 해야 하는 상태가 되어있었다. 

  사람들은 글이라도 써보라고 했다. 이전처럼 이번에도 글이 삶을 구원해 줄지 모른다면서. 그러나 스페이스 바를 누를 힘조차 없는 상태로 며칠을 누워 지내면서 뭔가 많이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엉킨 정도가 아니라 애초에 시작부터 잘못 꿰맸다고 생각했다. 셔츠 꼭지에 올라가서야 삐뚤빼뚤 잠갔다는 걸 알게 된 것처럼, 온 생이 부정당하는 기분. 내가 알던 나는 변화구를 찾으면 언제고 힘들었냐는 듯 길을 찾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의 나는 깊은 내리막에서 도저히 올라올 생각이 없는 지점에 있었다. 엉망인 삶이 계속됐다.

  결국 엄마아빠에게 빌어가며 현재 상태를 설득하고 토해내 가며 돌아가는 비행기를 탔다. 회피라는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이성적인 만류가 있었고, 걱정 어린 시선이 있었지만 첫 단추를 잘못 꿰매놓고 버둥거리기만 하는 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성은 본능을 이기지 못하니까.

  다시 글에 손을 대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작가님을 찾는 브런치의 알람이 울렸고 블로그의 새 글을 찾는 사람들이 간혹 있었지만 그럼에도 다시 쓰는 건 두려웠다. 다 소용없어진 마당에 뭘 바라고 다시 쓰냐고 생각했다. 하지만 글과 담을 쌓는 동안에도 자주 글에 대해 생각했다. 뭘 쓸까, 언제 쓸까... 안 쓰기로 했으면서 계속 그런 고민을 했다. 수년간 이어진 습관과 애써 무시하려는 마음의 충돌이 늘 일었다. 

  지금도 트라우마로 남은 상해에서의 생생한 5일. 새벽엔 누군가의 비명이 들리고, 잠기지도 않는 문 때문에 안 좋은 짓을 당할까 벌벌 떨었다. 아침이면 춥고 황량한 폐가 같은 집에서 눈이 떠지지도 않을 정도로 울기만 했다. 모두의 얼굴이 무서웠다. 나갈 수도 없고 갇혀있는 것도 불안전한 곳에서 5일은 50주만큼 길었다. 그러나 5일. 난생처음으로 나를 지켜주는 선택이었다. 다시 글과 대면하는 마음을 갖게 한 건 스스로를 살리기 위해 도망쳤던 그 기억 덕분이었다.  

  결국 지속 가능한 글을 쓰는 방법은 어떤 모습이든 날 지킬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쉽게도 이젠 글이 희망은 아니다. 글 없이도 적당히 살 수 있다. 극악의 상황을 만나면 삶이 글을 앞서가기도 하니까. 혐오스러운 날 참아내는 방법으로 쓰기를 택하기보다 이젠 지키기 위해 쓰려한다. 외면하지 않아도 괜찮은 날이 올 거라고 믿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