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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승일 Sep 12. 2024

어머니 발톱을 깎아 드리고 생긴 일

대부분의 경찰관들은 명절 연휴 내근(행정) 근무자들을 제외하고 평일과 같은 24시간 정상 근무를 실시 합니다. 특히 지역 관서인 지구대나 파출소는 더욱 엄격하게 휴가 인원이 통제됩니다. 저도 올해 기동대 발령 전에 지역 관서에서 근무했던 4년 동안 설날과 추석에 별도의 휴가를 쓰지 못했었습니다.


올해 경찰관 기동대로 왔지만 지난해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경찰관 기동대의 경우 출동해야 하는 인원이 정해져 있어 많은 인원이 휴가를 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난주 고향인 전주에 다녀왔습니다. 추석이 지나고 한 번 더 내려갈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주 고향 집에 갔다가 어머니와 점심을 먹다 어머니의 발톱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깎아야 할 때가 훨씬 지났는데 손질 못 하신 게 밥을 먹는 내내 신경이 쓰였습니다. 식사가 끝나고 커피를 한잔 마시기 위해 거실에 앉았을 때 어머니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머니 발톱이 왜 이렇게 길 때까지 놔두신 거예요. 손질 좀 하셔야겠어요. 제가 깎아 드릴게요”


“나이가 들수록 손톱은 그래도 깎을 수 있는데 발톱은 자르기가 귀찮고 쉽지 않다. 그래서 아주 심하다 싶을 때까지 기다렸다 자르고 해서 그래”


평소 신경을 쓰지 못했던 저 자신이 죄송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발톱을 하나하나 손질해 드릴 때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어머니의 발톱도 나이만큼이나 그리고 얼굴의 주름만큼이나 늙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서울로 돌아오는 내내 생각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이번에 가장 잘한 일은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드린일이다는 생각에 다소 위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습니다.


어제 저녁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전 경찰서에서 함께 근무하며 친하게 지내던 후배가 곧 결혼한다고 해서 청첩장을 받기위해 만났습니다. 후배는 제가 요즘 힘들어 보인다며 장어와 복분자를 사줬습니다. 그리고 청첩장도 받았습니다. 저는 지난주 있었던 어머니의 발톱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기영아, 너 어머니 발톱 깎아 드린 적 있어?”


“아니요 없는데요. 그리고 우리 어머니의 성격상 제가 깎아 드린다고 해도 절대 못 하게 하실걸요. 그래도 어머니랑은 친하게 지내니 할 수는 있죠. 아버지는 절대 못 하겠지만요”


“진짜? 그러면 오늘 한번 집에 가서 어머니 발톱을 손질해 드려봐. 이제 곧 결혼도 하니 그럴 일이 평생 없을지도 몰라. 지난주 나도 어머니 발톱을 깎아 드리면서 진짜 많은 생각이 들더라. 죄송하고 감사하고, 어머니의 발톱에서도 세월의 흔적이 있더라고‧‧‧”


“아, 생각해 보니 못 하겠는데요” 한참을 생각한 후배의 대답이었습니다.


“만약 오늘 중에 어머니 발톱을 깎아 드리고 형한테 카톡을 보내면 30만 원을 줄게. 그래도 안 할 거야?”

    

“30만 원요? 진짜 주시는 거죠?”


“당연하지. 남자가 약속했는데 무조건이지”


“좋습니다. 어머니가 주무셔도 말씀드리고 미션 수행 합니다”


저도 알고 후배도 압니다. 꼭 돈 때문에 약속을 지키겠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망설였습니다. ‘어머니께서 싫어하시는 건 아닐까. 괜한 짓을 하는 것은 아닐까’하고요. 하지만 제가 그 일을 경험하고 깨달은 게 참 많았습니다. 그래서 후배에게도 꼭 그걸 알게 하고 싶었습니다.


후배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어머니 발톱을 깎아 드릴 수 있겠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우리는 그렇게 약속하고 각자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 잠이 들었습니다. 후배의 카톡은 아침에야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요. 후배가 보낸 문자는 밤 ‘12시 00분’에 와 있었습니다. 저는 보는 순간 당황했습니다.


어제 우린 분명 오늘 중으로 보내기로 했는데 ‘00시 00분’에 온 문자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그래서 저는 경찰관스럽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후배가 23:59분에 보낸 문자입니다. 사진 이미지(후배 어머니의 귀한 발을 모자이크 처리했습니다)가 전송되지 않고 있어 캡쳐 사진을 보내왔습니다.



자, 선생님 조정(합의)을 신청합니다.

  

먼저 어제 제가 12시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실수로 잠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문자를 확인하지 못하고 아침에 일어나서야 확인했습니다.  제 실수입니다. 깔끔하게 인정하겠습니다.

 

1. 어제 기준으로 ‘오늘까지 보낸다는 것은’ 23:59:59‘까지를 말라는 거로 생각합니다. 이는 민법에서도 도달주의를 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파일을 보내는 쪽에서 59분에 보냈더라도 상대방에게 도달한 시점이 00시 00분이므로 어제가 지났다고 봐야 합니다.


2. 하지만, 어제 내기의 근본적인 취지가 어머니의 발톱을 후배께서 결혼 전에 깎아 드리고 얻는 감사함이었기에 목적은 달성되었다고 봅니다.


3. 그런 점에서 이번 조정안은 15만 원입니다. 합의에 동의하시면 빠른 회신 부탁드립니다. 이상.

     

그리고 한참 뒤 후배로부터 제가 보낸 장문의 문자에 맞대응이라도 하는 듯 회신 문자가 왔습니다.



1. 당일 22:30경 대화를 기준으로 ’오늘 12:00까지‘라고 함은 일반적으로 익일 00:00까지라고 해석되며, 00:00까지는 00:00를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2. 네트워크상 오류로 23:59경부터 전송이 되지않아 00:00경 직후 사진이 전송된바, 그 이전에 목표 행동이 이루어진 것이 확실하고, 이 또한 약속된 00:00(오늘 12시라 칭한 시간)에 맞춰 도달했음이 확인됩니다.


3. 아울러, 사진 전송 이후 3회 이상 카톡에도 답장이 회신 되지 않았습니다.


4. 하지만, 근본적인 취지로 어머니의 발톱을 결혼 전에 깎아드렸고 “술을 먹고 와서 뭐 하는 짓이냐?”라는 잔소리를 들었지만, 형님 말씀대로 평소라면 하지 못했을 행동을 행하여 좋은 경험을 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조정(합의) 신청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이번 합의에 동의합니다.


후배는 장문으로 제가 보낸 문자에 반박해 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수긍했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이상한(?) 내기는끝이 났고 저는 즉시 15만 원을 이체했습니다. 후배는 그 돈으로 어머니의 안경을 사는 데 보탤 생각이라는 문자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줬다는 말도 꼭 해준다고 했습니다.


저는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꼈습니다. 추석이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고향 방문 때는 부모님의 발톱을 한번 깎아 드리는 건 어떨까요?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지금이 가장 쉬울때입니다.


지금이 기회입니다.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면 합니다.


덧붙이는 글 : 이번 에피소드를 통해 후배와는 더욱 가까워진 느낌입니다. 앞으로도 함께 경찰관으로 근무하면서 보람있는 일을 많이하고 싶습니다. 진심으로 후배의 11월 결혼도 다시한번 축하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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