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바보다)
그저께 아침식사를 하다가 문득 돌아가신 친정 부모님이 생각났다. 오빠, 나, 여동생 삼 남매를 키우신 부모님은 유독 오빠를 눈에 띄게 귀하게 여기신 남아선호사상이 깊게 박힌 세대였지만, 나에게 주신 사랑, 추억도 많은 편이었다. 60년대 그 무렵, 넉넉지 않은 살림살이였는데 특히 엄마와 아버지의 높은 교육열 덕분에 우리는 대도시로 유학까지 갔다. 그래서인지 지금 현재의 나는, 나의 인생 과정이 어떻게 흘러 왔던지간에 밥 걱정 안하고 살고 있다.
결혼 무렵 남편이 장손으로 제사가 있다고 해서 아버지께서는 심지어 제사상 차리는 방법도 가르쳐 주셨고 김장하는 방법까지도 가르쳐 주시면서 딸내미가 잘 살기를 가르쳤다. 시집을 와서 나는 시조모님과 시외조모님(시어머님께서 아들 형제가 없어서)까지 같이 살았다. 물론 어머님과 내가 같이 살림을 하였지만 교직생활을 하는 나는 시간적인 여유가 너무 없었다. 남매를 낳아서 기르고 성장하는 가운데 같이 살던 시조모님, 시외조님께서 돌아가시고 집안이 조금 여유가 있을 무렵, 시어머님께서 암으로 돌아가셨다. 너무 황망해서 아직도 생각만 하면 가슴이 쿵쾅거리고 눈물이 난다. 진심으로 시어머님은 어른들께 잘하시고 며느리인 내게도 잘하신 분이셨다. 그래서 우리가 살던 그 동네에서는 마주치던 분들마다 우리 집을 화목한 집이라고 하시면서 부럽다고 하셨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가끔 하느님은 착한 사람을 먼저 데려가시나 싶은 생각을 하곤 했다. 이러저러한 우리 집안의 여러 스토리가 있는 세월을 거쳐 시아버님께는 작년에 96세로 건강하게 사시다가 그야말로 음식을 못 삼키시고 돌아가셨다.
난 결혼해서 며느리로서 할 일을 잘했다고 생각했다. 명절 차례를 비롯하여 기제사는 당연히 받아들이고 하기 싫은 내색 한 번도 낸 적이 없다. 곁에서 지켜보던 딸내미는 엄마처럼 살지 않는다고 제사 안 지내는 집안으로 시집을 갔다. 우습지만 미리 다 알아보았다고도 했다. 난 결심을 했다. 2년 전 결혼한 아들 녀석에게는 노후 부담 안 주기, 특히 제사 문제는 우리 세대에서 끝내기로 남편과 합의를 보았었다. 나 혼자만 힘든 일을 하면 된다고 생각하였고 버거운 문제들을 후손들에게 넘기고 싶지 않았다.
그럭저럭 별 갈등 없이 지내오고 있는 편이다. 나의 시집에 열중하다 보니 나의 친정 부모님들께는 너무 소홀한 점이 많아서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고 가슴을 치면서 후회하지만 지나간 세월을 어찌하겠는가?
내 심정을 아는지 다행히 서울 사는 아들 녀석은 장가간 후로, 요즘에는 거의 매일 전화로 안부를 물어온다. 점심 먹으러 식당에 가서는 기다리는 동안이나 출장을 가서 잠시 짬이 나면 전화를 하고는 그냥 목소리를 들으려고 했다고 한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행복하고 더 바랄 것이 없다. 나는 나의 부모님께 전화도 자주 못 드렸던 것 같아서 생각만 하면 목구멍이 메어져 눈물만 혼자서 펑펑 쏟는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나는 혼자서만 삭히고 후회하고 속을 끓이다가 남편에게
" 시골에 있는 엄마 아버지 산소에 가려고 하는데 같이 갈래요? " 하니 고개를 저으며 혼자 가라고 했다.
순간, 나는 심한 말(?)이 튀어나올뻔했다.
나의 친정 엄마는 나의 남편을 끔찍이도 생각했다. 친정에 행사가 있어 우리가 출발한다고 하면 그 즉시 쪼그리고 앉아서 마른김 100장을 시골에서 직접 만든 참기름을 슥슥슥 바르셔서 구워놓고 기다리시곤 했다. 나의 남편, 즉 사위가 김구이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는 허리굽은 모습으로 김을 구운 것이다. 부모님께서는 아들사랑도 유별났지만 사위사랑도 그렇게 표현을 하시곤 했다. 그런데 진작에 나는 나의 남편 부모님(시부모님) 모시고 사느라고 나의 부모님께 소소한 효도 표현을 자주 못하고 보냈다.
이제 내가 나이 들어보니 나는 너무나 원통했다. 그런데 남편까지 이렇게 인정머리 없이 딱 잘라서 혼자 가라고 말을 하니 순간 나는 남편에게 정나미가 싹 떨어져 버렸다. 그리고 얼굴도 보기 싫었다. 아무리 경상도 사내라고 하지만 여태껏 살면서 그동안 수고 많았다 소리 한 번 안 하는 남자, 오직 자기 본가만 알고 챙기는 남자였던 것이다. 난 순간 챙겨준 밥상까지 확 그냥 엎어버리고 싶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나는 바보다. 주일미사로 성당에 갈 때마다 나이 드신 신부님께서 걸걸한 목소리로 말씀하시는, 사랑, 배려, 용서 등등 단어를 떠올린다. 그러다 보니 그 순간 속만 상하고 넘어가기를 한, 두 번이 아니다. 참고 참으며 참을 인자를 새기며 살다 보니 이젠 내 속은 그냥 속이 없다.
나는 기댈 곳이 필요했다. 그래서 엄청 크신 분 하느님께 의지하는 것 같다. 어차피 이생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서 그냥 포기하고 바보처럼 살려고 한다. 미워한들 사람은 안 바뀌는 것을 알기에 다음 생에는 혼자 살기를 약속하며 이 바보는 또 참았다. 조만간 날씨가 따뜻해지면 엄마, 아버지 산소는 나 혼자 가야지. 어차피 달고 가면 귀찮은 존재(남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