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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나 Jan 10. 2021

범띠 가시나

태권도 학원에 처음 갔던 날을 기억한다. 시큼한 땀냄새가 공기를 채우던 도장 안에 들어서니 푹신한 초록색 바닥에서 정신없이 뛰어노는 남자아이들과 그 전에는 본 적 없었던 중고등학생 오빠들, 검은 띠를 맨 사부님, 그리고 도장 중앙에 걸려 있던 커다란 태극기에 나는 왠지 모르게 주눅이 들어 버렸다. 나는 주춤주춤 거리며 도장 구석에 있던 피아노 의자 옆에 쭈그려 앉았다.


나는 집에 가고 싶어 졌다. 그때 한 아이가 내게 다가왔다. 짧은 커트머리에 안경을 쓰고 있어서 나는 처음에 남자 아이인 줄 알았다. 그 아이는 햇살처럼 밝게 웃으며 피아노 밑에 쪼그려 앉아 있는 내게 인사를 했다.


"안녕? 너 젓가락 행진곡 칠 줄 알아?"


다짜고짜 그 아이는 내 앞에서 젓가락 행진곡을 치기 시작했다. 나는 일어나서 그 친구가 연주하는걸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 아이는 내게 연주하는 법을 알려 주었고 우리는 그날 친구가 되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박효주, 내 인생의 "첫 친구"였다. 효주는 나와 같은 학년, 같은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효주는 나보다 몇 달 먼저 학원을 다녔다고 했다. 효주는 태권도 학원 오빠들이 놀리거나 장난을 치면 참지 않았다. 그 아이는 끝까지 쫒아 가 우릴 괴롭히는 오빠들에게 똑같이 되갚아 주었고 나는 그런 효주가 너무 좋았다. 


우리는 남자들 뿐인 학원에서 꼭 붙어 다니며, 서로를 지켜 주었다. 사부님은 86년생 호랑이띠인 나와 효주를 "범띠 가시나"라고 불렀다. 나는 밝고 에너지가 넘치는 효주가 너무 좋았다. 우리는 학원에 가지 않는 날에도 만나서 해가 질 때까지 놀았다. 효주와 나의 집은 정말 가까워서 효주가 나를 집에 초대해 이것저것 먹을 것을 챙겨주었다. 


어느 날은 효주네 집에서 놀고 있는데, 효주네 오빠가 집에 돌아왔다. 효주는 평소와는 다르게 표정이 굳어져서는 잠깐만 안에서 기다려 달라고 했다. 효주에게는 중학생 오빠가 있었는데, 평소 오빠에 대해 내게 잘 이야기하지 않았었다. 갑자기 밖에서 효주와 오빠가 싸우는 소리가 들려 나가 보았다. 효주의 오빠는 내 앞에서 효주의 배를 발로 찼다. 나는 너무 놀랐지만, 효주는 아무렇지 않은 척 나를 안심시켰다. 효주는 그런 일이 일상적인 일인 것처럼 이야기했다. 나는 효주를 위해 뭔가 해 주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었다.


나는 내가 효주네 집에 놀러 간 것이 효주를 그렇게 만든 게 아닌가 싶어, 그 뒤로는 효주네 집에 잘 가지 않았다. 그리고 정말 어렵게 우리 집에 효주를 데리고 왔다. 무서운 부모님이 계신 우리 집에 친구를 데려오는 것은 내겐 정말 큰 용기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엄마는 효주가 맘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다른 또래 여자애들과 달리 짧은 머리에 보이쉬한 스타일과 자유분방한 모습에 엄마는 "발랑 까진 친구"라며 다시는 집에 데려오지 말라고 하셨다. 나는 너무 속이 상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을 다신 만나지 말아야 하나라는 생각에 괴로웠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효주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야 한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멀지 않은 곳이지만 그때는 전학을 간다는 것이 영영 헤어지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난 그때 너무 슬펐다. 마음을 나눈 사람과 헤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효주는 이사를 가고 나서도, 가끔 나를 보러 찾아와 주었다. 나는 겨우 한번 효주를 보러 갔다. 나는 그전까지 한 번도 버스를 타 본 적이 없었는데, 효주를 만나기 위해 용기를 내어 찾아갔다.  하지만 우리는 점점 서로 떨어져 있던 시간의 공백을 채울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중학생이 되었고, 고등학생이 되어 어느 순간부터는 서로의 연락처 조차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래도 내 인생에서 "친구"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효주"뿐이다.

어두운 피아노 의자 뒤에 앉아있던 나에게 햇살처럼 다가와 주었던 내 인생의 첫 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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