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4살 위의 오빠가 있었다. 이름도 기록도 남아 있지 않은 나의 오빠는 미숙아로 태어난 지 3일 만에 엄마의 가슴에 묻어야 했다고 했다. 엄마는 모진 시집살이를 했다. 가난했던 아버지와 계획에 없던 임신을 한 엄마는 20살에 할머니 집에 얹혀살게 되었고, 만삭의 몸으로 혼자 20포기의 김치를 담갔다. 그날 엄마는 허리가 끊어질듯한 고통과 몸살로 드러누웠고, 아버지는 그날 할머니와 심하게 싸웠다고 했다.
엄마는 결국 조산을 했고, 인큐베이터에 있던 오빠는 일주일을 채 견디지 못했다고 했다. 엄마는 제대로 슬퍼할 겨를도 몸을 회복할 틈도 없이 또 일을 시작해야 했고, 엄마는 그 후 4년 동안 임신과 유산을 반복했다고 했다. 엄마가 나를 임신했을 때는, 아버지가 유명한 한의원에 새벽부터 줄을 서서 보약을 받아 먹였다고 했다. 나는 그렇게 이 세상에 태어났다.
엄마는 엄마가 겪어온 힘든 삶을 여자인 내가 겪을 것을 생각하니 기쁘다기 보단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섰다고 했다. 그래서 엄마는 내가 아들이기를 간절히 바랬다고 했다. 엄마는 할머니에게 딸을 낳았다며 구박을 받았고, 맏며느리는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할머니의 성화에 엄마는 내가 태어난 지 겨우 7개월 만에 또 임신을 했다.
그때 둘째 작은 어머니도 비슷한 시기에 임신을 했는데, 작은어머니는 꿈에서 빨간 고추를 땄고 우리 엄마는 파란 고추를 땄다고 했다. 할머니는 그 얘기 듣고 우리 엄마에게 "얘, 넌 또 딸이구나. " 라며 기를 죽였다. 다행히 할머니의 꿈해몽은 반대였다. 파란 고추를 딴 우리 엄마는 아들을 낳았고, 빨간 고추를 딴 둘째 작은 어머니는 딸을 낳았다. 엄마는 내 동생을 낳고 너무 기뻐 눈물이 났다고 했다.
엄마는 오빠가 죽지 않았다면, 나를 낳지 않았을 거라고 말씀하셨다. 그땐 너무 가난하고 힘들어서 하나만 낳으려고 했는데, 내가 딸이었기 때문에 아들을 낳아야 했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내가 딸로 태어난 게 미안했다. 나는 내가 여자인 게 너무 싫어서 초등학교 때는 일부러 머리를 짧게 자르고 남자아이처럼 하고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초등학교 4학년 때 너무 빠르게 찾아온 2차 성징으로 그 짓은 일찌감치 그만두어야 했다.
"네가 16살이 되었으니, 네 오빠는 이제 막 20살이 되었겠다."
엄마는 항상 내 나이에 4살을 더해 오빠의 나이를 같이 세어보곤 하셨다. 엄마는 그렇게 매 순간 오빠를 그리워했다. 단지 그 이야기를 들어주기엔 내가 너무 어렸 던 것 같다. 그런 아픔을 풀어놓을 곳이 고작 어린 딸인 나 밖에 없었던 우리 엄마도 얼마나 불쌍하고 가엾은 사람이었는지. 나도 오빠가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어떤 사람이었을지 궁금하고 보고 싶은데, 수개월을 몸속에 품었던 엄마의 마음은 오죽했을까.
그때의 나는, 단지 엄마에게 "나"로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자기 부정과 절망감에 빠져있었다. 나는 마치 잘못 태어나, 무의미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엄마가 미웠던 게 아니고 나는 그냥 "나"로서 엄마에게 사랑받고 싶었다.
"엄마는 내게 잘못을 했고, 나만 아팠다"라고 얘기하고 싶은 게 아니다. 그때의 불행하고 불안했던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고, 엄마가 내게 했던 말들이 나에게 상처를 주기 위함이 아니었고, 나 또한 엄마의 아픔에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을 바로 잡아가고 싶다.
어린 시절의 엄마는 내게 무서운 존재였고, 사춘기 시절의 엄마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고, 지금의 내게 엄마는 가엾은 존재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보다 더 아팠던 사람은 엄마였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내 상처만 바라보느라 엄마의 아픔을 보지 못했다.
나는 다행히도 가정에서는 받지 못했던 사랑과 돌봄에 대한 결핍을, 좋은 친구들과 선생님, 그리고 남편을 통해 채워 나갔다. 그런 나에게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아프고 고통스러운 과정이지만 내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저 깊은 바닥부터 나의 아픔을 치유 해 더욱 단단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엄마가 진짜 의지 할 수 있는 그런 딸이 되고 싶다. 한 가지 더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렇게 되기까지 너무 늦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엄마에게 꼭 이 말을 듣고 싶다.
"네가 내 딸이라서, 참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