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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나 Jan 27. 2021

내 안의 놀라운 아이

요즘은 비밀번호가 기억나지 않을 때 핸드폰이나 메일 주소로 비번 설정을 다시 할 수 있지만, 얼마 전만 해도 비밀번호를 기억하기 위해서는 "첫사랑의 이름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같은 이상한 질문들에 답을 해야 했다. 그 많은 질문들 중에 내가 선택했던 질문은 "가장 기억에 남는 선생님은?"이었고, 그 답은 항상 같았다. 


김정희 선생님


초등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이셨다. 희고 고운 얼굴에 안경을 썼지만 선한 눈매가 그대로 드러났고 부드럽고 기품 있는 목소리로 항상 내게 따듯한 관심을 주셨던 분이다. 어김없이 집에 안 좋은 일이 있으면, 어두운 얼굴로 책상에 앉아 있던 내게 선생님은 먼저 다가와 말을 붙여 주셨다.


"진형아 괜찮니? 무슨 일 있니?"


나는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따듯하게 물어 봐 주시는 선생님 앞에서 그만 울어버리고 말았다. 선생님은 우는 나를 아무 말 없이 한참 바라봐 주시다가, 나의 집이 어디냐고 물으셨다. 선생님은 우리 집 주소를 가만히 들으시더니, 상냥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선생님 집도 가까운데, 언제든 선생님 집에 오렴"


선생님의 집은 정말 가까웠다. 우리 집에서 대로변으로 나가 길 하나만 건너면 나오는 주공아파트 단지였다. 나는 선생님이 알려주신 아파트 동호수를 받아 적었다. 그리고 정말 집에 있고 싶지 않았던 어느 주말 오후에 선생님 집으로 무작정 찾아갔다. 


다행히 선생님은 집에 계셨고, 갑자기 찾아온 나를 따듯하게 맞아 주셨다. 선생님의 집에는 머리가 새하얀 할머니도 한분 계셨는데, 개의치 말고 들어와 쉬라고 하셨다. 선생님의 집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담한 사이즈의 포근한 느낌이 드는 공간이었다. TV가 있는 안방에 처음 보는 할머니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냥 그 집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선생님은 내게 이것저것 간식을 챙겨 주셨지만 나는 하나도 먹지 않고 몇 시간을 그냥 멍하니 앉아 있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선생님은 나를 인정해 주고 칭찬해주는 말을 많이 해 주셨다. 나는 엄마보다도 선생님이 좋았다. 선생님께 더 인정받고 싶어서 그때부터 공부를 열심히 했다. 선생님께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었다. 정말 열심히 공부했고, 기말고사 시험에서 올백을 받았다. 그렇게나 기가 죽고 항상 위축되어 있었던 나는 4학년 때는 반장 선거까지 나갔고 쭉 반장을 도맡아 했다. 




선생님이 내게 보여주신 따듯한 관심과 인정의 말들은 내 안의 "놀라운 아이"를 깨어나게 했다. 삶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야 하는 이유와 목적을 내 안에서 스스로 찾을 수 있게 인도해 주셨다. 그때 선생님이 내게 무관심했다면, 나는 그 어두운 마음의 그늘 아래 계속 머물러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순간들이 있다. 차갑고 어두운 바닷속 깊이 혼자 잠겨 내려가는 기분, 너무 캄캄해서 출구가 어딘지 보이지도 않는 공간에 갇혀있는 갑갑함. 그런 어두운 곳에서는 작은 빛도 밝게 느껴진다. 


처음으로 내게 따듯함을 알려주신 고마운 선생님, 그때 나는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도 서툴렀고 부끄러워 선생님께 단 한 번도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려 본 적이 없다. 단지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선생님 주변을 서성거리는 것뿐이었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드러내는 일은 그때 내게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선생님을 너무 찾고 싶어, 교육청 사이트를 다 뒤지고 다녔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너무 보고 싶은 김정희 선생님. 지금의 나를 보면 또 뭐라고 얘기해 주실까. 그때 나를 어둠에서 건져 빛을 보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그때 선생님이 날 잡아 주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지도 모를 거라고, 선생님께 감사의 마음을 꼭 전해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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