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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나 Jan 09. 2021

너도 네 아빠랑 똑같아

나의 아버지는 화가 많은 사람이었다. 단순히 "화"라고 말하기보다는 그냥 "마음의 병"이 있다고 하는 게 옳은 표현일 것이라 생각한다. 아버지는 평소에는 괜찮다가도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갑자기 화를 내는 분노조절 장애가 있었다. 


어느 날은 엄마 혼자 집에서 김장을 담그고 있는데, 손에 양념이 묻어있어서 TV를 보며 누워있는 아버지에게 믹서기에 넣어 놓은 마늘을 좀 갈아 달라고 부탁했다. 아빠는 갑자기 " 날 지금 무시하는 거야?"라고 소리를 지르며 깐 마늘이 담겨있던 믹서기를 집어던지고, 엄마가 정성스레 썰어놓은 무와 양념이 담긴 빨간 다라를 엎어버렸다. 그렇게 한참 집안의 온갖 살림살이를 다 때려 부수고 아버지는 집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며칠 뒤에 혼자 제주도를 다녀왔다면서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작은 돌 하르방과 제주도 기념품을 잔뜩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내게 선물이라며 조개로 만든 목걸이와 팔찌를 주셨지만 나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엄마는 아무 말 없이 아버지가 들고 온 돌 하르방을 거실에 있는 전축 위에 장식으로 올려놓았다. 나는 돌하르방을 볼 때마다 바닥에 널브러진 김장양념을 치우며 눈물을 훔치던 엄마의 모습이 떠올라 그 돌하르방을 몰래 가져다 버리고 싶었다.


아버지의 분노는 어린 시절부터 비롯된 듯 보였다. 유복했던 할아버지는 그 시절에 선린상고를 나와 제일은행에 취직해 10살이나 어렸던 17살 할머니를 만나 결혼을 하고 그해에 우리 아버지를 낳았다. 할아버지는 결혼 후 돈을 벌지 않고 연예인을 하겠다며 매일 집 밖을 나다니셨고, 그 뒤로 집안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맏이라는 이유로 아주 어릴 적부터 동생들의 교육과 집안을 책임져 왔다. 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공장에서 16시간을 일하며, 공장 건물 위에 있는 다락방에서 쪽잠을 잤는데, 공장 주인에게 너무 오래 잔다고 매를 맞았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때 겨우 13살이었다.


나와 내 남동생도 아버지에게 많이 맞으며 자랐다. 물론 우리가 잘못한 일들도 있었지만, 어떤 때는 내가 뭘 잘못해서 이렇게 맞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많았다. 그래서 나와 남동생은 남다른 전우애를 가지고 있다. 그런 내 동생이 어엿한 직장인이 되어 가족들과 함께 술 한잔 하게 되었던 날, 갑자기 동생이 술에 취해 아버지에게 물었다.


" 왜 그때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들을 그렇게 때린 거예요?"


순간 정적이 흘렀다. 엄마는 그때 아버지가 가게 음식상을 뒤엎어 버릴까 봐 두려웠다고 했다. 다행히도 아버지는 침착하게 말했다. 자신의 아버지는 자식들을 방관한 사람이었지만, 나는 방관자가 아니라 그게 부모 노릇이라고 생각했다고. 나는 아버지를 이해했지만, 용서할 수 없는 순간들도 많았다. 아버지는 내가 너무나 미워하는 사람이면서도 내가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었다.


“너도 네 아빠랑 똑같아.”


엄마는 내가 무슨 잘못을 하거나, 화가 나면 꼭 저 말을 앞에 붙여 잔소리를 하시곤 했다. 엄마는 아버지와 다투거나,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버지가 일방적으로 화를 내고 집안 살림을 다 때려 부술 때마다 그 화를 꾹꾹 참으셨다가, 불쑥불쑥 나에게 화를 쏟아 내곤 하셨다.


" 너네 다 버리고 도망갈 거야, 엄만 정말 네 아빠랑 못 살겠다."


그때 나는 아직 중학교 1학년이었고, 다른 친구들이 학업과 친구관계로 고민을 할 때, 나는 어떻게 혼자 살아가야 할지를 고민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늘 엄마 눈치를 봤고, 엄마가 언제 우릴 버릴지 모른다는 생각에 학교에서 무슨 힘든 일이 있어도 엄마에게 절대 말하지 않았다.


엄마는 신기하게 나에게 하듯이 남동생에게는 힘들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늘 나에게만 힘든 얘기들을 쏟아 내셨다. 어렸을 때는 내가 마치 우리 집의 샌드백 같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누구나 와서 주먹으로 발로 마구 때릴 수 있는 샌드백. 그래서인지 나는 결혼을 하고 자연스럽게 부모님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 워낙 어릴 적부터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고 뭐든 혼자 해 왔던 게 편한 나였기 때문에 부모와 떨어져 사는 삶이 나는 더 자유로웠다.


한참 효리네 민박이라는 프로그램이 인기였을 때, 민박집 손님이었던 7살 차이의 연자매 이야기를 보게 되었다. 두 자매 사이에는 다운 증후군의 남자 형제가 있었는데, 여동생이 오빠가 슬픈 일은 언니에게만 얘기하고, 자기에게는 기쁜 일만 얘기해 준다면서 섭섭하다는 얘길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이효리가 말했다.


"오빠가 누나는 의지하고, 여동생은 사랑하나 보다" 


그 얘길 듣는데 갑자기 엄마가 떠올랐다. 엄마가 내게 했던 그 많은 푸념들과 힘든 이야기들... 그런 엄마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던 나의 사춘기 시절... 엄마는 내게 의지 했고, 나는 엄마를 사랑했구나. 엄마와 내가 주고받은 말들은 아픈 말들 뿐이었지만, 그 안에는 서로 의지하고 사랑해 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때 내가 좀 더 성숙했더라면, 엄마가 내게 의지하고 싶었던 마음을 더 깊이 헤아렸더라면, 지금 엄마와 나의 관계는 조금 더 좋아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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