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평화주의자, 깍두기
난 어릴 적부터 매번 깍두기였다.
줄넘기나 고무줄 혹은 편을 가르는 놀이를 할 때, 누구도 같은 편이 되고 싶지 않은 아이, 그러나 밉진 않으니 놀이에서 빼고 싶진 않다. 그럴 때 원만하게 상황을 해결하는 게 바로 깍두기 제도다.
이편도 아니고 저편도 아니지만, 이편이기도 하고 저 편이기도 하다. 고무 줄 넘기를 할 때면, 저편에서도 뛰고 이편에서도 뛴다. 뭐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으며, 실력의 변변찮음으로 승부에 영향을 미치지도 않는다. 몇 초의 시간이면, 실력이 떨어지는 나 같은 아이도 즐겁게 같이 놀 수 있다. 어느 편이 이겨도 기분 좋은 깍두기다.
누군가는 이 깍두기가 싫어 울기도 했지만, 나는 좋았다. 날 선 경쟁에서 좀 떨어져서, 이편도 저편도 모두 응원하다 보면, 과열경쟁에서 벌어지는 싸움에서도 여유롭다. 깍두기에게 의견을 묻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
그랬다. 난 싸움도 큰 소리도 싫었다. 어릴 적부터 무섭고 두려웠다. 아이들이 조금만 큰 소리를 내도 기 죽기 일쑤였다. 그런 내가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여전히 주특기는 참기, 그리고 조용히 이편도 저편도 아닌 듯 지내기. 그러다 쌓이고 쌓이면 목 놀아 울기도 했다. 소리도 나지 않는 울음, 남편은 영문을 몰랐다. 본인은 기억도 가물가물한 일들이 한꺼번에 쌓여 우는 아내, 그것도 소리도 없이 가슴을 치며 서럽게 우는 아내를 남편은 달랠 줄도 몰랐다. 눈만 껌벅이며 서 있는 남편은 마치 깍두기 같았다. 시댁과의 갈등에서도 깍두기 역할이면 좋으련만, 그것만은 아닌가 보다.
지금도 난 그렇다. 무슨 일이든 그저 큰 소리 없이 평화롭기를, 그리고 내 입장이 어느 편도 아니길, 그래서 경쟁이나 싸움에서 자유롭길 원한다. 누군가는 회색분자, 혹은 박쥐같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분명히 말하는데 나는 평화주의자 깍두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