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연재글-
지난 두 번째 연재 글에서 저는 한반도 평화에 대해 제기할 수 있는 3가지 일반적인 반론들, 이러한 반론들 사이에서 우리가 던져야 하는 질문은 무엇인지, 그리고 한반도 평화라는 관점에서 지금 우리 사회가 접근할 수 있는 실제적 대안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그 대안으로 ‘유럽연합’(European Union)을 제시했습니다. 오늘은 1945년 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유럽 대륙과 한반도는 각기 어떤 선택, 그리고 어떤 경로로 나아가게 되는지를 역사적 맥락에서 비교해 보겠습니다.
먼저, 한반도입니다. 자료의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해 1945년 2차 세계대전 이후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부분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된 제7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를 기준으로 보겠습니다. 이 책의 123쪽 ‘대한민국의 성립과 발전’에서 우리 민족이 광복을 맞이한 이유는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항복을 선언하였기 때문이며, 우리 민족이 분단의 길로 가게 된 것은 미군과 소련군이 38도선 이남과 이북에 진주하여 군정을 실시하였고 이로 인해 우리 민족도 우익과 좌익으로 분열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기술합니다.
(책 123쪽 내용: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이하였다. (중략) 하지만, 광복의 감격과 각계각층의 건국 운동이 곧바로 자주 독립 국가의 건설로 연결되지는 못하였다.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이유로 미군과 소련군이 38도선 이남과 이북에 진주하여 군정을 실시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미·소의 분할 점령과 함께 우리 민족도 우익과 좌익으로 분열하기 시작하였다. (중략) 결국 자주 독립의 통일 국가를 수립하지 못한 채 분단의 길로 가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50년 6월 25일, 한반도는 남한과 북한은 루비콘 강을 건너게 됩니다. 동일한 책의 125쪽 ‘6.25 전쟁’을 보면, 소련의 지원 하에 북한이 남침을 강행하자 유엔은 미국을 중심으로 16개국의 유엔군을 한반도에 파견합니다. 이후 3년간 지속된 이 전쟁으로 눈으로 보이는 한반도의 물질적 피해는 물론, 남북 사이에 보이지 않는 불신과 적대 감정으로 분단은 고착됩니다.
(책 125쪽 내용: “북한은 소련의 지원하에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남침을 감행하였다. 유엔은 전쟁이 나자 안전 보장 이사회를 소집하여 북한의 남침을 침략 행위로 규정하였고, 이에 미국을 중심으로 한 16개국이 유엔군을 파견하였다. (중략) 3년간 계속된 6.25 전쟁으로 우리 민족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수백만 명의 사상자가 생기고, 전쟁 고아, 이산 가족이 발생하였으며, 전 국토가 초토화되어 대부분의 산업 시설이 파괴되었다. 그리고 남북 사이에는 불신과 적대 감정이 높아져 분단이 더욱 고착화되었다.”)
정리해 보면, 1945년 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약 한반도는 미·소의 분할 점령과 함께 통일국가가 아닌 분단의 길을 가게 되었고, 6.25 전쟁으로 인해 남북 사이의 분단은 더욱 고착화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착화의 길은 7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하며, 오히려 이 고착이 자연스러운 세대가 바로 우리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한반도에서의 평화보다 갈등과 분단이 익숙한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동일한 시기의 유럽지역은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요? 1939년 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1945년 2차 세계대전의 종전이 한반도에도 영향을 미쳤지만, 유럽지역에는 그야말로 막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천여 년 동안 정치·경제의 중심지였던 유럽이 이제는 미국과 소련에게 그 영향력을 빼앗기게 됩니다. 연합군의 승리로 막을 내린 2차 대전이지만, 유럽은 초토화되었습니다. 패전국인 독일과 이탈리아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승전국인 영국과 프랑스조차도 상처뿐인 승리였습니다.
그 구체적인 증거가 바로 1947년 3월의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입니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해리 트루먼(H.S. Truman)은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의 확대를 막기 위한 미국 외교정책을 발표합니다. 처음에는 영국이 원조를 하던 터키, 그리스 등 지중해 국가에게 더 이상의 원조를 할 수 없다는 발표를 하자 이 지역의 영향력이 소련으로 넘어갈 것을 우려한 미국이 이 지역에 영국이 하던 원조를 자신들이 담당하겠다고 발표한 것입니다. 그 이후 이 독트린은 유럽 경제 부흥 계획으로 불리는 1947년 6월의 ‘마샬플랜’(Marshall Plan)과 대서양 국가 사이의 집단 안보 기구인 1949년 4월의 ‘나토’(NATO: 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의 창설로 구체화됩니다.
2차 세계대전으로 유럽 전역이 초토화된 것은 물론, 유럽은 오랜 시간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세계 패권을 미국에 빼앗기고 자신들의 경제와 안보 문제를 미국에 구걸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 같은 눈에 보이는 맥락과 함께 1900년대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유럽 국가들 사이의 갈등과 불신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습니다. 히틀러의 독일에 대항했던 프랑스의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과 영국의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 지금까지 각각 프랑스와 영국 국민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과 수상이라는 점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수도인 파리의 공항 이름이 바로 샤를 드 골 공항이며, 영국의 수도인 런던의 의회가 있는 웨스트민스터에는 여러 존경 받는 위인들의 동상이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첫 번째 동상이 바로 처칠 동상이다.)
1900년대 두 차례의 걸친 세계대전으로 유럽 국가들 사이의 적대적 감정, 처참한 경제 상황, 그리고 미국으로의 세계 패권의 이양 속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유럽은 역내에서의 적극적 평화를 모색합니다.
*출처: Derek W. Urwin, “The European Community: From 1945 to 1985”. in European Union Politics, Oxford University Press, 2012, p. 14.)
위 <표-1>은 2차 대전 이후 초기 유럽 지역에서 통합과 평화를 위해 어떠한 노력들이 있었는지를 정리한 내용입니다. 핵심은 유럽은 2차 대전의 종전과 함께 역내 지역에서의 평화정착을 위해 경제통합이 아닌 정치·군사적 통합을 우선순위에 두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유럽연합의 경제공동체로 인식하고 있으며, 유럽의 통합은 저위 정치 분야(low politics)에서 고위 정치 분야(high politics)로 점진적으로 확대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를 구체화한 이론이 바로 신기능주의(Neo-functionalism)이며, 이 이론을 우리 한반도에도 적용한 적이 있습니다. 그 사례가 바로 ‘개성공단’입니다. 남과 북 사이의 경제적 협력이 정착되면, 그 효과가 고위 정치 분야인 정치와 군사분야로도 이어질 것이라는 이론적 틀 속에서 나온 것이 바로 개성공단입니다.
그러나 유럽 통합의 초기 역사를 보면, 유럽은 역내에서의 전쟁과 갈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경제 공동체가 아닌 안보 공동체를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경제원조 정책인 마샬플랜과 안보 협력 기구인 나토의 창설 이후, 유럽은 1949년 5월 유럽 평의회(Council of Europe)를 창설합니다. 유럽 평의회는 유럽지역의 민주주의, 인권, 그리고 법치주의와 같은 제도와 가치를 확산시켜 제2차 세계대전과 같은 전쟁을 막기 위한 정치기구입니다. 이듬해인 1950년 프랑스의 외무장관이었던 로버트 슈만은 유럽 통합의 매우 중요한 시발점인 유럽석탄철강공동체(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안을 담은 슈만플랜을 발표합니다. 이 슈만플랜의 골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가장 치열했던 독일과 프랑스의 접경지역인 라인강 주변에서 많이 생산되는 석탄과 철강을 공동으로 관리하자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슈만은 획기적인 유럽지역의 군사안보 정책을 발표합니다. 그것이 바로 독일과 프랑스의 군대를 유럽이 공동으로 관리한다는 ‘유럽방위공동체’(European Defence Community)입니다. 쉽게 말해, 남한과 북한이 6.25 전쟁을 겪고 5년 후에 남한의 외교부장관이 남과 북의 군대를 공동으로 관리하자는 정책을 발표한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 안을 실제적으로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효율적으로 논의하기 위한 정치기구, 유럽정치협력(European Political Community)도 설립합니다. 즉, 2차 대전의 참상을 경험한 지 10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유럽의 국가들 사이에서 전쟁을 막기 위한 엄청나게 적극적인 시도들이 정치 지도자들 사이에서 태동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노력은 1954년 프랑스 의회에서 유럽방위공동체(EDC) 안이 부결되면서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유럽 지역에서의 전쟁의 참상을 막기 위한 가장 적극적이고 확실한 안이었던 유럽방위공동체는 실패되었지만, 유럽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의회에서의 부결이 있고 2달 후 유럽 통합의 후퇴를 막기 위해 유럽은 서유럽동맹(Western European Union)을 설립합니다. 이후 2년 여 동안의 실무적인 노력 끝에 지금의 유럽 경제공동체의 실질적인 시발점이 되는 유럽경제공동체(European Economic Community)를 이탈리아 로마에서 시작합니다.
역사적 맥락과 함께 다양한 조약과 기구들의 출현으로 내용을 이해하는데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꼭 기억해야 하는 부분은 동일한 전쟁의 참혹함을 경험한 한반도와 유럽이 어떻게 다른 경로를 선택하게 되었는가입니다. 한반도는 ‘소극적 평화’의 지속을 선택했습니다. 1945년 외부에 의한 광복, 5년 간의 외부 세력의 통치, 그리고 같은 민족끼리 총을 겨눈 6.25 전쟁을 경험합니다. 이후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나뉜 상태에서 양측의 정치 지도자들과 정치집단은 분단을 고착화하는 정치적 항로를 선택합니다. 그리고 그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지워졌습니다.
반면, 유럽은 ‘적극적 평화’의 제도화를 위한 피나는 노력을 선택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은 경제적 피해는 물론 세계 정치의 중심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프랑스의 장 모네, 로버트 슈만, 그리고 콘라드 아데나워 등으로 대표되는 정치 지도자들은 전혀 예상을 뒤엎는 정치적 선언들을 했습니다. 단순히 경제적 협력이 아닌 서로 총구를 겨누었던 국가의 군대들을 공동으로 관리하는 유럽방위공동체 선언, 전쟁의 가장 중요한 물자인 석탄과 철강을 공동으로 관리하는 유럽석탄철강공동체 선언 등. 비록 이러한 정치적 선언이 프랑스 의회의 부결로 실패했지만, 그들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역내 평화 정착’이라는 제1의 목표를 수정하지 않고 경제협력이라는 우회로를 만들었습니다.
1945년 이후 초기 한반도와 유럽지역에서의 이 같은 차이를 통해 70여 년이 지난 현재 두 지역을 다시 평가합니다. 유럽은 단순히 경제 공동체를 넘어 연합이라는 정치 공동체로의 발전을 거듭하며 역내에서의 전쟁은 상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반면, 한반도는 아직도 휴전의 상태로 서로 총구를 겨누고 있을 뿐만 아니라 ‘종전선언’을 두고도 남한 사이의 정치인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존재하는 현실입니다. 안타까운 현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