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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uyper Jun 30. 2024

From 파리 To 로마

-1950년대 유럽통합의 역사-

 연일 울려대는 핸드폰 경보음에 짜증이 나기도 한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더욱 짜증이 난다. 내용은 바로 북한에서 오물풍선을 보내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내용이다.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2024년에 북한에서는 오물풍선을 보내고, 이에 질세라 남한은 대북확성기를 틀고 있으니. 답답함을 넘어 짜증이 난다. 이런 상황에서 ‘평화’를 주제로 글을 쓴다는 것이 지나치게 현실을 무시한 이상주의자의 모습은 아닐까. 그러나 오히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평화’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는 것이라며 자위해 본다. 


 지난 네 번째 연재 글에서는 여전히 냉전적 구도가 살아 있는 한반도의 현실을 ‘관료정치모델’이라는 이론으로 살펴보았다. 반면, 한반도와 비슷한 전쟁을 경험한 유럽은 왜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는지 ‘주권’이라는 개념을 통해 접근해 보았다. 이번 시간에는 1950년대 유럽통합의 역사를 1952년 파리조약과 1957년 로마조약을 토대로 이야기하려고 한다. 


 ‘유럽’(Europe) 혹은 ‘유럽연합’(European Union)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이미지는 다양할 것이다. 예를 들어, 여행의 관점에서 어떤 사람은 유럽의 배낭여행에서 포르투갈에서 스페인으로, 스페인에서 이탈리아로 국경의 제한 없이 넘어가는 신기한 경험으로 인해 유럽에 대해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질 수 있다. 반면, 어떤 사람은 유럽의 배낭여행에서 파리, 베를린과 같은 유럽의 아름다운 도시를 갈 때마다 경험해야 했던 소매치기의 경험으로 인해 유럽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질 수도 있다. 또한, 국내 언론을 통해 접하는 유럽을 보면서 어떤 사람은 최근 기후 문제에 대한 유럽연합의 적극적인 행보를 보며 국제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며 긍정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 반면, 어떤 사람은 브렉시트와 같이 회원국의 탈퇴로 인해 유럽연합이라는 정치체가 앞으로 존속은 가능한 것인지 부정적으로 인식할 수도 있다. 


 특정 개인에 대한 이미지 혹은 평가가 다양하듯이, 유럽 또는 유럽연합에 대한 평가 또한 다양할 수밖에 없다. 아니면, 지정학적 위치 때문인지 혹은 세상의 중심은 미국이라는 정서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국제정치에서 유럽연합의 역할에 대한 언론의 노출이 미미하기 때문에 평가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잘 모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연재글을 통해 분명하게 함께 생각해보고 싶은 것은 비슷한 시기 전쟁을 경험한 두 지역이 시간이 지날수록 전혀 다른 정치적 결과물을 낳고 있는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래서 이 연재의 제목이 “전쟁, 그리고 평화를 위한 여정”이다. 

<사진-1> 유럽통합의 시초가 되는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의 설립을 골자로 한 파리조약의 장면이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총구에 연기가 채 사라지기 전, 1951년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눴던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와 함께 베네룩스 3국(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은 파리에서 향후 50년간 유효한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설립에 합의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파리조약”이다. 이 조약의 핵심은 2차 대전 당시 가장 격렬하게 싸웠던 독일과 프랑스 접경지역(프랑스 측에서는 스트라스부르를 중심으로 한 알자스로렌 지역이며, 독일 측에서는 라인강을 중심으로 한 루르지역이다)의 석탄과 철강을 공동으로 관리하는 초국가기구의 설립이다. 이 조약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전쟁의 가능성을 이성의 기획과 제도적인 협력을 통해 봉쇄할 수 있다”(김남국, 2011)는 모네의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파리조약 합의 후 유럽지역에서 모네와 슈만을 대표로 하는 연방주의자들의 목소리는 날로 커져갔다. 급기야 국가주권의 최후의 보루이자 전쟁의 수단인 군대를 통합하는 유럽방위공동체(EDC) 구성을 위한 노력에 박차를 가한다. 당시 EDC 조약안 제38조에는 이 조약이 6개국에서 비준되면 6개월 안에 유럽 시민들의 직접 선거에 의해 선출되는 의회는 물론 유럽헌법(European Constitution)을 작성하도록 계획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비준이 실패하면서 유럽방위공동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1952년 파리조약으로 유럽의 6개국 정부와 연방주의자들은 안보공동체(Security Community)를 향한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프랑스 의회에서 비준이 실패하면서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이에 하나의 유럽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전쟁의 가능성을 이성의 기획과 제도적인 협력을 통해 봉쇄’하고자 했던 연방주의자들은 전략의 변화를 꾀한다. 즉, 전쟁의 원천봉쇄라는 궁극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안으로 제시했던 안보공동체를 뒤로 하고 경제적 통합에 보다 집중하기 시작한다. 구체적으로 먼저 모네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는 ECSC의 사례를 따라 유럽에서의 원자력공동체 형성을 꾀하고 있었다. 지금은 안전한 에너지도 아니고 청정에너지도 아니지만 1950년대 당시 원자력은 미래의 에너지원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특히, 1950년대 유럽에서 원자력은 생소한 분야였기 때문에 회원국 사이의 협력을 이끌어내기 용이하다는 점과 당시 회원국들 사이에서 가장 큰 안보위협으로 인지했던 서독의 핵무기 개발을 방지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원자력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장홍, 1994). 이에 원자력공동체를 통해 유럽의 통합 노력을 이어가고자 했다. 


 또 다른 방안으로는 당시 네덜란드 외무장관이었던 베이언(Beyen)을 중심으로 한 회원국 사이의 수평적인 경제통합을 목표로 한 관세동맹(Customs Union)이었다. 관세동맹은 회원국끼리 관세에 관한 협정을 통해 상호 간 교역의 자유를 도모하는 것으로서 안보적 측면에서의 통합이 실패하자 경제적 통합으로 역내 통합의 끈을 이어나가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원자력공동체와 달리 회원국 사이의 수평적 경제통합을 위한 관세동맹은 상이한 관세정책으로 인해 국가 간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합의안을 도출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 당시 프랑스는 자국의 농업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공동농업정책(Common Agricultural Policy)의 실시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사진-2> 1957년 4월 1일, 로마조약 논의 당시 콘라드 아데나워, 왈터 할슈타인, 안토니오 세그니의 모습이다.

 유럽방위공동체의 실패로 안보공동체를 통한 역내 평화를 도모하던 유럽의 연방주의자들은 원자력공동체와 관세동맹이라는 경제적 도구로 역내 통합을 이어나가고자 했다. 물론 원자력공동체와 관세동맹 또한 회원국들 사이의 견해 차이로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경제 분야는 안보 분야보다 상호 간의 합의점을 도출하는데 용이했다. 이에 EDC의 실패 후 5년 만에 유럽 대륙의 6개국은 유럽 통합의 역사에서 또 하나의 이정표를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1957년 3월 25일 로마조약이다. 이 조약의 핵심은 유럽원자력공동체(EAEC 또는 Euratom)와 유럽경제공동체(EEC)를 설립하는 것이다. 로마조약으로 인해 유럽은 1952년 파리조약을 통해 출범한 유럽석탄철강공동체와 함께 유럽원자력공동체 그리고 유럽경제공동체라는 세 개의 기둥을 가지게 된 것이다. 결국, 유럽방위공동체의 실패를 경험한 유럽은 통합의 방향을 안보에서 경제로 바꾸어 두 개의 경제공동체를 탄생시켰다. 


 정리하면 유럽은 2차 대전이 끝난 직후 독일과 프랑스가 전쟁 물자인 석탄과 철강을 공동으로 관리하는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를 출범시킨 1952년 파리조약으로 국제정치의 새로운 실험을 알렸다. 실험이 성공한 듯 보였으나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유럽방위공동체(EDC)의 실패로 유럽의 이 새로운 정치적 실험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전쟁의 참화 속에서 국가들 사이의 전쟁을 막기 위한 정치적 실험은 안보에서 경제 분야로 옮길 뿐 그 여정은 이어졌다. 그 결과가 바로 1957년 로마조약으로 출범한 유럽원자력공동체와 유럽경제공동체 출범이다. 통합의 분야가 안보에서 경제로 바뀌었을 뿐 평화를 위한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1957년 로마조약 이후에도 유럽지역이 꽃길만 걸은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이번 다섯 번째 연재글을 통해 함께 고민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한반도는 과연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유럽 통합의 역사를 보면 여전히 안갯속이며, 2010년도 이후 유럽은 재정위기와 브렉시트를 경험하며 국제정치의 공간에서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에 ‘과연 유럽연합은 와해될 것인가’와 같은 질문이 쏟아지는 현실 속에서 그럼에도 우리 한반도가 유럽연합과 유럽 통합을 보며 던져야 하는 질문은 ‘우리의 방향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이다. 평화인지, 전쟁인지. 


 5년을 주기로 한반도에서 평화의 바람과 전쟁의 기운이 교차하고 있는 듯하다. 어떤 행정부가 들어서면 평화를 위한 노력을 하는 듯하고, 어떤 행정부가 들어서면 전쟁을 위한 노력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같은 갈팡질팡 속에서 우리 한반도는 평화를 위한 여정을 시작도 하지 못한 채 항상 5년을 주기로 제자리 혹은 후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불안하다. 유럽 통합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우리도 유럽처럼 하자고 이야기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다만, 분단과 그에 따른 전쟁의 가능성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키고 싶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전쟁을 경험한 유럽에서는 나름의 방법으로 전쟁에서 평화로 가기 위해 노력했고, 적어도 한반도보다는 평화에 더 가까이 있다는 것을 공유하고 싶다. 이에 우리도 서로 죽이는 것에만 집중하지 말고, ‘전쟁’과 ‘평화’라는 이분법이 아니라 ‘평화에 대한 방법론’을 두고 치열하게 논의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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