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유럽통합의 역사-
국제정치를 인식하는 관점은 크게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그 3가지는 현실주의(Realism), 자유주의(Liberalism), 구성주의(Constructivism)다. 물론 이 이론들 사이에서도 다양한 분류가 있지만, 교과서적인 분류를 한다면 이렇게 할 수 있다. 먼저, 현실주의는 무질서와 혼돈의 국제사회에서 국가(States)라는 유일한 행위자는 자신의 생존(Survival)이라는 유일한 목적을 위해 스스로 보호(Self-help)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명제에 숨겨진 의미는 무질서한 국제사회에서 유일한 행위자인 국가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국가 간 전쟁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러한 명제에 문제제기를 한 이론이 자유주의 이론이다. 이 이론은 자유무역과 민주적 제도 등과 같은 수단으로 국가 간의 전쟁을 방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비록 국제사회가 무정부적이라 하더라도 그 속에 존재하는 행위자는 국가만이 아니라 개인, 다국적기업 등 다양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국제정치학이 학문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약 100여 년 동안 지속되어 온 이 두 가지 이론에 존재론적인 문제제기를 하기 시작한 이론이 바로 구성주의다. 구성주의에 따르면, 현실주의와 자유주의 이론이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인 ‘국제사회의 무정부성’이라는 전제가 무조건 혼돈과 무질서는 아닐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 현실에 있는 행위자들이 그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전쟁이 일어날 공간이 될 수도 있고, 평화가 지속되는 공간이 될 수도 있다고 강조한다. 전혀 다른 인식론을 제기한 이 구성주의 이론은 소련이 붕괴되고 탈냉전으로 탈바꿈하는 1990년대 태동되어 이후 유럽통합 이론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1960년대 유럽통합을 이야기하면서 갑자기 국제정치 이론을 들먹인 이유는 유럽통합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또한 이 이론들의 그림자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런던에서 유럽정치학 수업을 들을 때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바로 “Intergovernmentalism”(정부간주의)과 “Supranationalism”(초국가주의)다. 학생들은 물론 교수들도 매 수업 때마다 이 논쟁을 이어가며, 심지어 학과에서 매주 2-3개씩 학생들과 교수들을 대상으로 세미나를 진행하는데 이 세미나에 정부간주의 이론을 창시한 모라브칙(A. Moravcsik)을 줌으로 초대해 논의하기도 했다. 학교 측에서 대립되는 두 이론의 창시자 중에서 모라브칙만을 초대한 것은 안타깝게도 유럽통합의 초국가주의 이론을 창시한 하스(E. Haas)는 이미 고인이 되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한다.
1993년 모라브칙의 ‘자유주의적 정부간주의’ 이론은 유럽통합을 국가가 자국의 이익을 위한 협상의 결과물로 인식한 반면, 1958년 하스의 ‘신기능주의’(초국가주의) 이론은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국가보다 상위 단위인 초국가적 기구의 역할을 강조하며 특정 분야의 협력이 타 분야의 협력으로 전이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하스의 이 이론이 모라브칙의 자유주의적 정부간주의 이론이 제기되기 전까지 약 30여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유럽통합을 설명하는 가장 주된 분석틀이었다. 그렇다면, 왜 그리고 어떻게 하스의 ‘신기능주의’ 이론이 그렇게 오랜 시간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을까?
하스(Haas)의 신기능주의(Neo-Functionalism)는 1950-60년대 유럽통합의 역사를 설명하는데 가장 용이했다. 신기능주의 이론의 핵심 명제는 특정 분야(당시는 경제협력)의 협력이 다른 분야(주로 정치협력)의 협력을 가능케 하는 파급효과(spillover effect)가 있으며, 이 과정에서 이를 가능케 하는 행위자는 국가가 아닌 기술전문가(technocrat)와 유럽 집행위원회(European Commission)와 같은 초국가적 기구라고 주장한다. 즉, 모라브칙의 정부간주의 이론이 3가지 국제정치 이론 가운데 국제사회의 유일한 행위자는 국가라고 주장했던 현실주의 이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하스의 신기능주의 이론은 국가 간 협력이 가능하며 이 협력의 주체는 국가뿐 아니라 개인과 다국적 기업 등과 같은 다양한 행위자일 수 있다고 주장한 자유주의 이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유럽통합의 역사를 살펴보면 왜 하스의 이 같은 이론이 설득력이 있는지 알 수 있다. 지난 시간까지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유럽 지역의 국가들이 어떤 통합의 노력들을 했는지 살펴보았다. 초기 유럽통합의 주된 변곡점은 1952년 2차 세계대전의 당사자인 프랑스와 독일이 석탄과 철강을 공동으로 관리하는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설립, 이 기세를 몰아 1954년 유럽의 군대를 공동으로 관리하는 계획인 ‘유럽방위공동체’(EDC)가 제안되었지만 프랑스의 반대로 무산,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런 실패를 딛고 협력의 분야를 정치·군사분야가 아닌 경제분야로 선회한 1957년 로마조약이다.
1957년 로마조약은 “상품, 사람, 자본, 서비스의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한 공동시장(Common Market)을 창설한다는 계획에 따라 먼저 관세동맹에 착수”한다는 것을 목표로 유럽경제동공체(EEC)를 출범시켰다. 이후 경제공동체에 참여한 6개국(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사이에서 역내교역이 증가하고, 이들은 괄목한 만한 경제부흥기를 경험한다. 이는 당시 유럽경제공동체(EEC)가 근로자의 고용기회 확대와 생활수준 향상을 위해 마련한 유럽사회기금(ESF), 회원국 내의 낙후지역 개발을 위한 유럽투자은행(EIB), 그리고 역내 교역으로 타격을 입을 수 있는 농산물 가격 안정과 농산물 생산자의 소득향상을 위해 마련된 공동농업정책(CAP)이 제도적으로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러한 제도 속에서 유럽경제공동체는 로마조약에서 목표했던 1970년보다 1년 6개월을 앞당겨 ‘관세동맹’을 완성했다.
이 같은 성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영국의 태도변화다. 지난 2016년 영국이 국민투표를 통해 유럽연합의 탈퇴를 결정하자 그 이후로 ‘브렉시트’(Brexit)라는 단어가 온 언론을 뒤덮으며 유럽연합의 엄청난 위기인 것처럼 떠들썩했다. 그러나 유럽통합의 역사를 살펴보면 영국은 항상 유럽통합의 걸림돌이었다. 영국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발생하기 전까지 세계를 호령했던 패권국이었다는 지나친 자만심과 자격지심, 그리고 다른 유럽국가들과 달리 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패권국이었던 미국과의 특별한 대서양 관계 등 때문에 항상 유럽이 하나의 유럽으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디딤돌이기보다는 걸림돌에 가까웠다.
보다 구체적으로 1960년 유럽자유무역협정(EFTA)을 살펴보자. 영국은 유럽통합이 자신들 중심으로 돌아가길 원했다. 이에 논의과정에서 자신들이 배제되거나 중심이 아니라고 판단하면 뒤로 빠지거나 관여하지 않았다. 이런 영국에게 1957년 로마조약을 통해 창설된 유럽경제공동체는 충격이었다. 2년 후 1959년 7월 20일, 영국은 부랴부랴 유럽경제공동체에 대응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스웨덴, 스위스, 덴마크, 노르웨이, 포르투갈과 함께 유럽자유무역협정(EFTA) 창설에 합의하고, 이는 1960년 발효되었다. 유럽경제공동체의 경제적인 성과는 물론 통합이 성공적으로 되는 것이 두려워 이에 대응하는 기구를 설립한 영국은 불과 1년 만에 1961년 8월 9일 유럽경제공동체에 가입 신청을 한다. 물론 당시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되었지만, 영국은 1963년에도 다시 한번 유럽경제공동체 가입을 신청한다.
이 사례가 분명하게 보여주는 점은 당시 1957년 로마조약으로 출범했던 유럽경제공동체의 경제적 성과가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주요국가들이 보기에도 확실했다는 사실이다. 유럽경제공동체에 대응하기 위해 6개의 국가와 함께 다른 경제협정을 이끌었던 영국이 불과 1년 만에 유럽경제공동체에 가입을 희망했다는 점은 당시 유럽경제공동체가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를 반증한다.
이러한 성공에 힘입어 유럽경제공동체는 1967년 또 한 번의 도약을 이루어낸다. 그것은 바로 1967년 유럽공동체(EC)로의 발전이다. 유럽경제공동체(EEC)의 성공을 경험한 유럽은 10년 만에 유럽경제공동체(EEC),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를 통합하기에 이른 것이다. 급기야 1972년에는 영국이 아일랜드, 덴마크, 노르웨이와 함께 유럽공동체(EC)에 공식적으로 가입하기에 이른다.
간략하게 살펴보았지만, 1960년대 유럽통합의 역사는 경제부흥이 토대가 되었다. 초기 유럽통합주의자들은 유럽 지역에서 참혹한 세계전쟁을 막기 위해 안보분야의 통합에 매진했으나 그 결과는 참혹했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우회로를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경제통합이었다.
1950년대 초기 유럽은 유럽석탄철강공동체의 성공을 경험하고 바로 유럽방위공동체를 통해 유럽통합의 성공을 꿈꾸었으나 처참히 실패했다. 그 결과 그들은 개별국가의 주권이라는 높은 벽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새로운 우회로로 경제공동체를 선택했다. 그 선택은 1960년대 대성공이었다. 그 성공의 메커니즘을 가장 잘 설명한 유럽통합 이론이 바로 1958년 하스의 ‘신기능주의’ 이론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질문은 “왜 유럽은 실패와 역경 속에서 왜 유럽은 통합의 진전을 지속해서 보였는가?”이며, 나아가 “유럽의 경제통합을 모델로 한반도에 시도했던 남북간의 개성공단은 실패했는가?”이다. 다음 글에서 이 질문에 대한 논의를 이어가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