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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진 May 02. 2024

'여보카도'라는 사치

작지만 큰 사치를 선사하는 삶


기다리던 병원 검사 결과를 보러 가는 날. 혹시 정말 어딘가 문제라도 있는 거라면, 당장 입원이라도 하라고 하면 어쩌나 걱정을 한가득 안고서 진료 대기실에 앉았다.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책을 읽은 후 건강 제일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해 왔으면서도 막상 질병의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일어나지 않은 일에 죄책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검사 결과를 보던 의사는 혈액염 증상은 항생제 장기복용에 의한 알러지성 같다고, 그 외의 여러 수치들이 모두 양호하다고 했다. 다만 근육이 부족하고 말초신경세포가 별로 없으니 운동을 많이 해야 한다고 조언해 주었다. 안감을 느끼며 진료실을 나왔지만, 말초신경세포가 부족하다니.. 뭘 어떻게 해야 세포가 생기려나 막막해졌다.


그로부터 며칠 후 아침, 오래 알고 지낸 동생과 안부를 주고받다가 아팠던 일련의 일들을 이야기했는데 그날 저녁 SNS로 갑자기 선물이 도착했다. 견과류와 아보카도였다. 아침에 아프다는 말을 듣고 하루종일 언니 생각을 했다며, 말초신경을 강화하는 5가지가 아몬드, 아보카도, 닭고기, 녹차, 다크초콜릿인데 그중에 자신도 좋아하는 두 가지를 보낸다고 했다. 괜한 걱정을 끼쳤나 싶어 미안하면서도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워서 거절도 못하고 허둥대는 나에게 동생이 말했다.

"가족 같은 사이인데(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죠ㅠㅠ)!! 그런 말씀은 마세요ㅋㅋ" 

가볍지만 진심 어린 동생의 말은 그동안의 어떤 항생제보다도 내 몸에 딱 맞는 치료제가 되어주었다. 그래서일까, 아보카도를 생각하면 수요 급증으로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코끼리 서식지를 빼앗는다는 이야기부터 떠올리는 나였지만 동생의 아보카도만큼은 행복하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남편이 오전 근무만 하고 집에 있던 날, 나는 평상시처럼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식탁에 보기만 해도 예쁜 아보카도 연어 샐러드와 감바스가 놓여있었다.

야식으로 먹던 감바스를 아픈 뒤로 야식도 술도 끊어 먹은 지가 한참이었는데, 저녁 메뉴로 올라오다니! 게다가 색도 고운 아보카도 연어 샐러드가 곁들여진 상차림을 보자 작년에 남편이 두 번째 육아휴직을 하고 나는 일을 하던 때가 생각났다. 4년 전에 동반 육아휴직을 했을 때 갈고닦은 솜씨로 퇴근 후 돌아온 나에게 늘 맛있는 저녁을 차려주던 그때. 그 당시 자주 했던 말이 '퇴근할 맛이 난다.'였는데, 오랜만에 그 기분이 다시 들었다.

마요네즈에 레몬즙과 꿀을 넣어 만든 소스가 잘 어울린다.



하지만 좋은 것도 잠시, 오랜만에 일찍 퇴근하였으니 개인 시간을 보내며 쉴 수도 있었을 텐데 장을 보고 재료를 다듬어 긴 시간  음식만들었을 것 같아 고마움을 넘어 미안함이 앞섰다. 최근 몇 달 동안 몸이 아파 맡은 집안일도 제대로 못해 남편이 대신하기 일쑤였고, 집에서 편히 쉬라며 아이들을 데리고 놀이터에 나가던 남편이었다.


족저근막염 때문에 고생하는 나에게 어느 신발 링크를 보내며 진지하게 고려해 달라고 정색하며 말하거나(비싸서 내가 바로 거절할 것을 알기에), 뒷꿈치 쿠션이 있는 양말 링크를 보내오고 영양제를 잔뜩 주문하여 먹으라고 내밀었다. 한 번은 고등어가 말초신경에 좋다더라며 미처 손질도 안된 고등어를 사서 내내 손질하고 구워주기도 했는데 그런 남편에게 집에 비린내 난다고 얼마간이나 타박했던 못된 반려자에게 다시 또 손이 많이 가는 요리를 내놓은 남편 앞에서 한없이 미안해진다.


다음날 아침, 웬일로 나보다 먼저 일어났나 했더니 아보카도와 삶은 달걀을 으깨 마요네즈를 넣고 버무려 식빵에 발라 먹출근하라며 내놓는다.


그다음 날은 아보카도에 참치를 넣고 버무린 후 그 위에 스크램블에그를 올려 샌드위치를 만들어 주었고,


또  어느 저녁에는 트리플 체다 치즈가 올라간 아보카도 샐러드를 내주었다.


그리고 며칠 전 저녁,  명란버터구이에 아보카드를 곁들인 요리를 끝으로 그 많은 아보카도를 다 먹었다.


나는 손질 한번 해보지 못하고 얻어먹기만 했는데 남편이 알뜰하게 속살을 파내고 놔둔 껍데기와 씨는 자주 보았다. 굳이 변명하자면 남편이 내가 요리할 틈을 안 주었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다.


어느 날인가 남편은 반을 가른 아보카도를 보여주며 귀엽지 않으냐고 했다. 똑같이 힘들게 일하고 와서도 겨우 애들 반찬을 어물쩍 준비하는 나와 달리 주섬주섬 냉장고를 열어가며 차근차근 예쁘게도 아보카도 요리를 만들어 내던 남편의 느린 손을 떠올리니, 그 피곤한 와중에 아보카도를 귀엽다고 느끼며 아픈 나를 위해 요리했을 마음을 짐작하니, 내가 너무나 큰 사치를 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만한 사치가 또 어디 있으랴.

남편이 귀엽다며 보여준 아보카도. 나에겐 고마운 여보카도


결혼 생활 9년 차, 생각해 보면 남편은 나에게 잔소리를 하거나 짜증을 낸 적이 거의 없다. 늘 잔소리를 하고 자주 짜증을 내던 나와 달리. 남편이 그런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해해 주고 배려해 주기 때문에 그냥 넘긴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아이들에게도 늘 그러하던 남편이 요새는 아이들을 대할 때 목소리가 높아지거나 짜증스러워지는 경우가 잦다. 그건 이 사람이 정말 많이 힘들다는 뜻일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에게는 늘 다정한 사람에게 나는 무엇을 해줬나 돌아보게 된다. 설거지 제대로 못했다고 구박했던 어제의 기억이 떠올라 괴롭다.


동생 덕분에, 남편 덕분에 '여보카도'라는 사치를 꽤나 누렸다. 고마운 사람들이 나누어준 마음들을 기억하고 사랑으로 갚아야 하는 삶이 나에게 남아있다. 사랑을 갚아야 할 사람들 말고도 내가 먼저 사랑을 나누어 줄 사람들도 많다는 것을 기억하며 나 역시 누군가에게 작은 사치를 선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덧. 아보카도 매력에 빠진 남편은 아보카도 요리에 계속 도전 중이다. 주말 아침에 먹은 괴카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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