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일정 중 비가 내린 날, 아이가 좋아하는 테디베어 박물관에 갔다가 올레 시장으로 향했다. 시장 먹거리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해 딸아이는 연신 신나 했다. 그러던 중 횟집 앞 수족관에 있는 물고기들에 관심을 보이더니 갇혀있는 모습이 불쌍하다며 안타까워하는 것이 아닌가.
'큰일이다. 저 물고기가 곧 음식으로 상에 오를 텐데 뭐라고 설명하나' 머릿속이 잠시 하얘졌다. 우선 아이의 마음을 공감해준 뒤, 차근히 설명은 해주었지만 내 답변이 스스로 만족스럽지 않아 집에 돌아가서 공부를 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식사가 시작되니 물고기가 불쌍하다던 딸아이는 회가 맛있다며 간장에 콕콕 찍어 야무지게 먹었다는 사실. 게다가 썰어져 나온 문어숙회의 정체를 묻는 딸에게 옥토넛의 잉클링 교수라는 것을 말해줬더니 잉클링 교수님 맛있다며 연신 더 달라고 하는 것이다. 동심 파괴를 우려한 모심이 파괴되는 순간이었다.
남편과 나는 '맥주파'이지만, 제주에 왔으니 한라산을 안 마셔 볼 수는 없다며 식사 중반쯤 소주를 한 병 시켰다. 남편이 따라 준 한라산 한 잔을 기대하며 마셨지만, 갑자기 속이 울렁거려 쌈장을 듬뿍 퍼먹어야 했다. 생각해보니 근 8년 만에 마시는 소주였다. 20대 때는 친구들과 곧잘 마시며 심지어 '달다'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새삼 내가 많이 늙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찰나, 딸아이가 "나도 따라주고 싶어." 라며 눈을 반짝였다. 엄마 아빠가 소주 마시는걸 처음 보았으니 그럴 수 있겠다 싶어 무심히 그러라 하고 술잔을 내밀었다. 그런데 딸아이가 소주병을 두 손으로 조심스레 잡고 기울이는 모습에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나이 들수록 자꾸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난다.)
언제 이렇게 컸나 싶어 눈물이 그렁해 딸을 보는데, 딸은 흘릴세라 초집중한 진지한 얼굴로 미션을 완수한 뒤 활짝 웃는다. 아무리 속이 울렁거린다한들, 딸이 준 인생 첫 잔을 안 마실 수는 없지. 원샷!
언젠가는 딸과 함께 술잔을 기울일 날이 오겠지. 그 날이 내심 기대도 되지만 너무 빨리 오진 않기를, 시간이 좀 더 천천히 가기를, 이 꼬맹이가 이렇게 조금 더 있어주기를.
여행 마지막 날, 딸아이가 좋아할 법한 '드르쿰다 in성산'에 들렀다. 아이는 보자마자 '야수의 성'이라며 달려갔는데 아마 본인은 '벨'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 떨어질까 걱정인 엄마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성 꼭대기까지 몇 번을 왕복한 뒤에야 딸은 만족한 듯 성을 빠져나왔다.
드르쿰다in성산
드르쿰다에서 나와 마지막 일정이던 감귤 따기 체험을 하러 갔다. 파란 하늘과 초록나무, 그 사이사이 주황빛 감귤이 콕콕 박혀 있는 풍경이 평온하고 아름다웠다. 아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바구니를 들고 다니며 귤을 땄다. 마냥 어리다고만 생각했는데 여행 와서 자꾸 아이가 많이 컸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아이와 새로운 경험을 함께하면서아이의 성장을 잘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깨닫는 시간들이었다.
감귤따기 체험
공항으로 가는 길, 아이는 예상대로 무척이나 아쉬워했다. 그런 딸아이가 안쓰러워 고민하다 경로 중간에 바다가 보이는 놀이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행시간 때문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15분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놀이터와 그네를 너무나 사랑하는 딸에게 바다를 보며 그네를 타는 추억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우리의 예상대로 딸아이는 놀이터를 보자마자 환호성을 지르며 이곳저곳을 탐색했다. 마지막으로 그네를 타던 딸은 바다를 향해 소리쳤다.
제주도야 안녕~~
몇 번이나 인사를 하는 딸아이를 보며 또 눈물이 울컥하는데 이 정도면 나도 병인가 싶었다. 아이는 그네를 타며, 나는 그 옆에 서서 하늘과 바다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마침 구름 사이로 햇살이 바다까지 내려와 신비한 느낌마저 들었다.그네를 높이 높이 타는 딸아이는 꼭 바다 위를 나는 것 같았다.
제주 어영공원 놀이터
첫째 아이 태명은 한울이고 둘째 아이 태명은 바다이다. 하늘과 바다가 함께 보이는 이 곳에 한울이와 바다를 안은 우리 가족 역시 함께라는 사실이 마음을 뭉클하게 했다. 더 바랄 것 없이 이렇게 건강하게 지낼 수 있기를 하늘과 바다에 기도했다.
길지 않은 여행이었지만, 이 마저도 동반 육아 휴직이 아니었다면 없었을 추억이라 생각하니 우리 가족에게 주어진 2020년 한 해가 정말 귀하게 느껴진 여행이었다.
아빠 껌딱지인 둘째는 여행 내내 아빠와 한 몸이다시피 지냈다. 남편은 아기띠를 하고 걷고 먹고 다 했다. 첫째 때는 가까운 곳을 외출해도 무엇을 챙겨야 하는지 관심도 없던 그가, 이제 둘째의 수유 텀과 이유식을 꼼꼼히 챙기고 여벌 옷까지 챙기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자신이 해야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 행동의 변화를 가져오는지 남편을 통해 알아간다.
그렇게 여행 내내 고맙게도(?) 많은 시간을 아기띠나 유아차 안에서 잠들어 있었던 둘째를 위해,둘째가 세 살 정도 되면 다시 한번 제주도를 찾고 싶다. 그땐 첫째와 나란히 손잡고 걷는 모습을 보며 또 울컥병이 도질지도 모르겠다.
일상으로 돌아온 딸은 곧잘 제주도 여행 이야기를 한다. 또 가고 싶다고 늘 덧붙이며. 나와 남편도 그렇다. 여행이 주는 특별함, 때로는 소소함이 그리워 자주 이야기한다. 앞으로 또 언제 떠날 수 있을지 모를 미지의 여행을 기대하며 소풍 전 날의 마음으로 살아가야지.
제주도에서 찍은 사진들로 작은 포토북을 만들어 놓았다. 언제든 딸아이가 볼 수 있도록.언제든 우리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