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찾게 되는 사람은 가족이나 지인일 것이다. 나는 가족이 있으나 의지할만한 가족은없었고 그 가족들이 너무나 큰 리액션을 취할 것이 눈에 선했다. 그것이 되려 날 힘들게 할 거 같아 제일 먼저 지인을 찾았었고 그것이 힘들게 되었을 때 인터넷을 찾았었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만나는 것이 고통을 재단하는 것, 불행을 비교하는 것이다. 그러한 행동을 하는 이유는 좋게는 '그 정도는 아무 일도 아니야. 괜찮아.'일 것이고 나쁘게는 '너보다 내가 더 힘들다. 다행인 줄 알아라' 일 것이다. 그 차이는 행동과 억양, 말의 내용에서 티가 나지만 둘 다 기분이 좋을 순 없다.
처음 친구에게 말하였을 때 내가 수술한 부위가 생식기였기 때문에 신경 손상으로 인한 감각 이상과 통증, 성욕 및 성감 상실, 기본적인 모양을 잃은 것 즉 신체이형에 대한 절망감에 대해 이야기하였다.(너무 슬프기 때문에 추후에 다시 언급하지 못하고 추상적으로 말할지도 모른다.) 한 친구는 아픈 건 뭐 어쩔 수 없지만 성은 중요하지 않은 거라고 그런 건 필요 없으니 괜찮다고 하였다. 그 친구가 성욕이 많지 않아서 그 친구에게는 중요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말이었을 것이다.(그렇다고 성관계를 안 하는 친구는아니었지만)그렇지만 그 친구는 중요한 걸 간과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와 같지 않다는 점과 타인에게 중요한 것을 함부로 결정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싫어하는 것과 강제로 잃은 것은 전혀 다르지 않은가. 그런 의미로 내가 만약 무성욕자라고 해도 관련 감각이 상실되길 바라지았을 거 같다. 이러한 점을 설명하였고 나에게는 중요한 부분이니 힘든 것이라고했더니 결국 중요하게 생각하니 고통스러운 거라고 중요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중요한 건 중요한 거지 어떻게 안 중요할 수가 있겠나. 이 글을 읽은 사람들 중 성감을 잃고 통감을 얻고 싶은 사람 손들어보라고 하면 몇 명이나 손을 들 수 있을까. 물론 내가 대상을 잘 못 고른 탓을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서로 마음만 상하니 관련 주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끝났다.
또 다른 친구는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듯하였다. 실제로 잘 들어주기도 하였다. 그 친구는 나와 함께 서로의 오래된 아픔에 대해 얘기를 많이 나눴던 친구였다. 그러나 내가 빈틈을 보인 것인지 내가 편했던 건지 모르겠지만 점점 나에게 매일 같이 힘든 일에 대해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친구의 고통은 좋지 않은 장 건강으로 인한 어려움이었는데 당신 나는 너무나도 심적으로 지쳐있는 와중에 그친구의 잦은 메시지와 전화를 대응해야 했고 모든 이야기를 경청한 후 위로도 해야 해서 점점 버티기가 힘들어졌다. '나도 지금 힘든데 왜 나에게 이러지?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할 무렵, "우리 서로 아픔에 대해 생각을 비워보는 연습을 하는 건 어떨까? 나도 몸이 이렇게 되었지만 최대한 생각을 안 하려고 해"라는 말을 하였고 친구는 "너는 사회생활에 아무 문제없잖아! 나는 사회생활조차 힘들다고!"라고 말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매우 큰 충격과 상처를 받았다. '과연 내가 사회생활에 아무 지장이 없어서 이렇게 방구석에 틀어 박혀있는 걸로 보이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순간은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친구는 나를 이렇게 생각해 왔구나 라는 배신감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 후 나는 이러한 점이 서운했고 왜 그게 상처였는지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으나 돌아온 답은 생긴 지 얼마 안 된 일이라 지금은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과 단발적인 사건을 겪은 내가 빨리 아픔을 딛고 일어났으면 해서 평생 힘들었던 자기의 아픔을 계속 얘기한 것이라고 했다. 내가 이러한 일로 단발적으로 아프고 끝날지 앞으로도 아플지를 왜 마음대로 판단하는지 알 수 없으나(단발적이라기엔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났다.) 그 친구는 자신의 고통이 제일 크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이 말을 계기로 그동안 나의 일을 어떻게 생각하였는지 짐작이 가서 가슴이 아팠다. 그래. 나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그렇게 따져보자면 내 입장에서는 나보다 그 친구가 더 불행하다는데 말릴 이유도 없으며, 내가 그 친구보다 덜 불행한 게 나쁠 것도 없다.
그래도 나는 그 친구들을 미워하진 않는다. 그 친구들 나름의 위로 방식이었을 것이고 단지 나와 맞지 않았던 것뿐이었던 것이다. 그냥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이다. 조금은 마음에 남는...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받고 싶지 않았기에 앞의 이야기에 언급했듯이 인터넷을 활용하게 되었다. 생각보다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는 없었던 의료사고 피해자들과의 접촉을 원했고 대화를 통해 공감과 위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과 좀 더 잘 통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보이지 않는 곳이네요. 저는 보이는 곳이라 더 힘들어요'라던가 '죽을병은 아니니 다행이라고 생각하세요'라는 말들로 상처를 주었다. 전자는 쌍꺼풀 수술을 한 사람이었고 후자는 죽을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며 그냥 인터넷상에서편하게 손가락으로 글을 쓰며 쉽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 걸 알기 때문에 생각보다 큰 상처를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까운 지인이었다면 정말 아팠을 것 같다. 저 사람들의 고통이 나보다 가벼운데 함부로 글을 써서 나에게 상처를 줬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서로 상처가 있는 만큼 또 그 상처가 조금은 비슷한 만큼 존중해 주길 바랐던 것이었는데 어려운 일인가 보다.
나는 개개인의 고통의 크기는 다 다르고 사건의 경중과 아픔이 비례하지도 않기 때문에 섣불리 가볍다 혹은 무겁다 판단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큰 장애를 가지고도 열심히 사는 사람이 있는 반면 100만 원의 경제적 손실로 생을 놓아버리는 사람도 있다. 그것은 아마 발생한 사건으로 인한 고통이 다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시점의 나의 환경, 삶에 대한 관점, 스스로에 대한 비판, 주변 시선과 말 등 '수많은 요소'가 작용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사람은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자신의 고통이 제일 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함부로 비교하고 재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내 고통이 제일 크면 상대방의 고통도 상대방에겐 제일 큰 것이니까.
남과 비교하는 것을 좋아하고 등급을 매기는 것을 좋아하는 한국인의 특성상 불행 비교가 너무나도 만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러한 행동들이 앞서 내가 말한 '수많은 요소' 중 한 가지로 작용한다는 걸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흘려들을 수 있는 말, 나랑은 안 맞는 말로 치부할 수 있다면 정말 다행이나 누군가에겐 삶의 의욕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말이란 걸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그렇게 어려운 말을 하면 대체 나더러 어쩌라는 것이냐, 무어라 말해야 하는 것이냐 할 수 있을 것 같다. 차라리 나한테는 그런 얘기를 안 해주었으면 하는 생각도 들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그러한 이야기를 당신에게 한다면 그건 당신이 그만큼 그 사람에게 신뢰가 깊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들은 아마 큰 용기 내어 말했을 것이고 살려달라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거창한 위로나 말을 바라는 건 아니다. 그냥 가볍게 치부하지만 말아주고 나의 고통을 슬픔을 존중해 주길 바란다.
추가로 인터넷을 통해 익명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이 글을 보고 있다면 당신의 고통이 어떤 것이든 쉽게 내뱉는 말이 꼭 따라온다는 것을 명심하고 많은 상처받지 않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