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고기가 좋아? 해산물이 좋아?”
20년 만에 함께 살게 되면서 엄마의 취향이 궁금해졌다.
“엄마는 그냥 다 좋아.”
“그래도 그중에서 더 좋은 게 있지 않아?”
요지부동. 계속 그냥 다 좋단다. 작전을 바꿔보았다. 예시를 들어주면 좀 더 말하기 쉽지 않을까?
“예를 들면, 나는 고기보다는 해산물이 좋아. 해산물도 생선류보다는 해조류 쪽이 좋아. 반찬은 된장보다는 간장이나 소금으로 간한 나물이 좋고. 국은 오랜 시간 여러 번 끓인 것보다는 방금 막 끓여서 다 먹어 없애는 게 좋아.”
내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엄마의 눈빛이 수상해졌다. 마치 내게 ‘염병하고 자빠졌네.’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염병하고 자빠졌네. 해주는 대로 먹어.”
아, 우리 엄마는 해주는 대로 그냥 먹는 걸 좋아하는구나…
함께 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묻지 않아도 엄마의 취향을 하나 둘 알게 되었다.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던 것과는 차이가 난다. ‘거추장스럽고 여성스러운 것을 싫어하는 편’이라고 생각했던 반면 실제로는 소녀다운 면이 많다. 검은색이나 때가 타지 않는 회색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빨간색, 보라색, 분홍색을 좋아한다. 바지가 편해서 입기는 하지만 언젠가는 화사한 컬러의 꽃무늬 원피스를 입어보고 싶어 한다. 꽃자수와 레이스를 좋아하고, 언젠가는 다육식물을 키워보고 싶어 한다.
떨어진 자존감을 다시 끌어올릴 때 자신의 취향을 알아가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한다. 어느 지역에 살고, 어떤 회사를 다니고, 어떤 직급이며, 연봉이 얼마인지... 이런 것 말고 내가 어떤 음악적 취향을 가졌는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어떤 상황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말이다. 예를 들면 나는 잔잔한 힐링 영화를 좋아하고, 가수 아이유의 음악을 좋아하며, 고양이를 사랑하고, 손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 이렇듯 소속된 회사나 직급이 아닌 나의 취향으로 이루어진 진정한 ‘나’를 알고 인정하면 좀 더 사랑해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엄마의 인생은 엄마에게 있어서 취향을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만들었다. 하고 싶은 것보다 해야만 하는 것으로 가득했고, 좋아하는 것은 뒤로 미뤄둬야만 했다. 이제와 돌이켜보니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것을 하고 싶어 했는지가 까마득한 것 같다.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로서 30년 넘는 세월을 살아왔다. 그 시간 동안 엄마의 취향도 함께 흐릿해졌다.
다시 엄마 안에 엄마 만의 오롯한 취향이 생겨나길 바란다. 돌아오는 엄마 생신 때에는 화사한 원피스와 예쁜 구두를 선물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