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적동 봄을 그리다(19)
산골이 어찌하다 개나 고양이를 버리는 곳이 되어졌는지?
며칠째 하얀 백구 한 마리가 우적동 산속을 혜메이고 있다. 차가 지나가면 달라붙는 것을 보니 누군가에 의해서 차에서 버려진 개다. 개는 자신의 버려짐을 실감하지 못하고 다시 데리려 올 주인이란 인간을 기다리는 중이다.
어쩌면 그는 개를 버리면서 여기서 잠시 내려 놀고 있으라 말했을지 모른다. 그 말에 개는 하염없이 그를 기다리는 중일지 모른다.
버려짐! 얼마나 허망할 지고.
이유야 저마다 있겠지만 사람들은 계속해서 키우던 개나 고양이를 산속에 데려다 버린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작은 강아지들도 내 다 버리고 늙은 개도 내다 버린다. 버려진 개들은 데려와 분양시키기도 하며 주인을 다시 찾아 보내기도 하며 유기견센터에 보내기도 한다. 버려진 고양이들은 민가로 내려와 온갖 난동을 일삼는다.
버린 그들에게 동물은 놀다 싫증 나면 버리는 한낱 장난감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데리고 놀다 싫증 나면 그냥 버린다. 생명체에 대한 윤리의식이 없다. 또 그 어떤 책임감도 없다.
인간의 만행은 이미 지구를 흔들어 버렸다. 신을 닮은 세상의 주인이라는 그릇된 자아인식이 온갖 약탈과 만행으로 이어지고 있다. 힘이 센 놈이 힘없는 놈을 지배하고 약탈한다. 뺏긴 힘없는 놈들은 저보다 더 힘없는 것들을 찾아 또 지배하고 억압한다. 우리는 그렇게 더럽고 추악하게 폭력을 정당화하고 지구를 흔들어 버린다.
도대체 이런 해괴망칙한 폭력은 누가 정당화시켰을까? 누가 만물의 영장이라며 신에 준하는 권리를 부여한 것인가? 그것이 신이 부여한 것이라면 신은 분명 파괴자이며 폭력배일 것이다. 그 신이 주구장창 내세우는 사랑은 그의 더러운 폭력성을 가리기 위한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에는 강한 자도 약한 자도 없다. 오로지 타협과 공존만이 존재할 뿐이다.
세상사 가잠 추악한 것은 추악한 만행을 신의 지시로 포장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신은 처음부터 이런 거짓선동을 위해 만들어졌을 것이다. 신이 만들어졌는지 존재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은 보이지 않고 단지 언어적 약속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