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참아야 하는 일들이 많지만 자녀를 키우면서 만큼은 아닐 것이다. 자녀가 어려서 힘이 없을 때 부모가 참지 않고 자기 기분대로 아이들을 대하며 키운 부모들은 언젠가는 그 대가를 치루는 것을 흔히 보게 된다. 가장 가깝게는 자녀가 사춘기에 접어들었을 때이다. 이때라도 부모가 각성하고 자녀의 사춘기를 지혜롭게 잘 참아주면 관계가 조금이라도 회복될 수 있다. 하지만 이때에도 부모가 각성하지 못하고, 크면 나아지겠지 라는 생각으로 지나치면 자녀가 결혼한 후에 그 대가를 더 톡톡히 치루는 것을 본다.
많은 것이 달라졌다. 특히 중년이 넘은 우리가 성인이 되었을 때 부모를 대하는 태도와 지금 성인이 된 우리 자녀가 우리를 대하는 태도는 조금 과장하면 하늘과 땅 차이 만큼이나 달라졌 다. 자녀에 대한 지원이나 지지는 부모세대보다 우리가 훨씬 더 잘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녀들은 부모인 우리에게 존경이나 감사는 하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평상시에는 도무지 알 수 없다가, 일 년에 한 번 받는 생일카드 혹은 생일케익 앞에서나 확인할 수 있는 정도이 다.
우리는, 특히 결혼한 후에는 명절이나 부모님 생신날에 부모님 댁에 가지 않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부모님이 아무리 못마땅해도 일단은 부모님 댁에는 간다. 가서 인상을 쓰고 있을지라도.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자기가 싫은 사람은 설령 부모라도 안 본다.
가까운 지인 중에 한 경우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 엄마로서 아이들을 잘 케어하지 않았다. 아 이보다 엄마인 자신의 감정이 더 중요한 사람이었다. 자기의 기분을 아이들에게 가감 없이 쏟 아내는 것을 여러 번 본적이 있었다. 아이들이 사춘기를 심하게 겪으면서 엄마랑 대립하기 시 작하더니 이제는 성인이 되었는데도 더 심해졌다. 한지붕 아래 살면서 엄마하고 같은 밥상에 서 밥을 먹지 않는다. 엄마가 상을 차려놓고 안방으로 들어가면 그제야 자녀는 식탁에 나와서 밥을 먹는다.
또 다른 경우는, 위의 경우와 다른 형태이긴 하지만 아이의 마음과 욕구를 받아주지 않고 엄 마의 생각이나 주장을 강요한 케이스이다. 이 자녀는 결혼한 후에 마치 복수라도 하듯이 엄마 의 마음을 후벼파는 짓을 한다. ‘다 키워놨더니 이제와서 엄마한테 이래도 되냐?’고 하는 엄마 의 말에 ‘엄마가 날 키웠어? 할머니가 키웠지’ 라며 엄마로서의 기본적인 인정도 대우도 안한 다. 그 상황을 옆에서 오랫동안 봐 온 나는 그 아이가 잘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 아이의 마 음도 충분히 납득이 된다.
사실 이 아이는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 진학과 취업을 두고 고민하다가 취업을 선택했다. 이 유는 부모로부터 하루라도 빨리 독립하고 싶어서이다. 무엇보다도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나면 부모에게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었고 그 생각이 결혼 후에도 지속되었다. 아이의 엄 마는 억울했다. 자신이 자녀 나이였을때 자신과 부모님(시부모님 포함)과의 관계는 상호의존을 중시하는 문화였다. 부모님과 매우 친밀한 유대감을 유지하도록 요구받는게 당연했고, 성인이 되었어도 중요한 일은 항상 부모님과 상의하여 결정하는 것이 인지상정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자녀는 자기처럼 하지 않는 것이다. 부모인 자신에게 무례하기 짝이 없으니 이런 배은망덕도 없다. 하지만 자녀의 생각은 달랐다. 부모의 생일을 챙기고 명절에 부모님댁에 와서 같이 식 사하고, 부모처럼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부모님댁에 와서 손주를 보게 해주는 것으로 나름 자 식으로서 도리를 한다고 생각한다. 가족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시각이 부모와 많이 다르다.
연년생 두 남매를 키울 때 아이들과 약속한 것이 있었다. 같은 잘못에 대해 열 번은 참아준다 는 것이다. 그 정도면 아이들도 스스로 혼날 짓을 했다고 인정한다. 그렇게 참아주는 것을 아 이들이 성인이 되면 안 해도 되는 줄 알았다. 성인이 되고 나니 ‘하고 싶은 말’을 참아내야 하 는 일이 많아진다. 아이들은 잔소리로 밖에 여기지 않으니 말해 봐야 소용도 없는 일이 부지 기수다. 잔소리는 맞는 말을 기분 나쁘게 하는 말이라고 한다. 그들의 반응을 보면 ‘맞는 말’ 보다는 ‘기분 나쁜’ 것이 먼저 아이들에게 다가가는 모양이다.
선교사를 하던 둘째가 돈을 좀 모아야겠다고 아르바이트로 주 2일 일하는 회사를 찾아서 일을 시작했다. 나머지는 자기 사업을 위해 준비하는 시간을 갖겠다고 했지만 아르바이트하는 2일 외에는 별로 하는 일이 없어 보였다. 어느날 회사에서 하루 더 나와달라고 하는데 거절했다고 태연하게 말한다. 하는 일도 없이 빈둥거리면서 거절한 것이 내 마음에 걸렸다. 그런 태도로 무슨 자기 사업을 한다고, 사업이 얼마나 힘든데. 내 입에서 하고 싶은 말이 당장 튀어나오려 는 것을 참았다. 말해봐야 방어적인 둘째의 반응이 어떨지 뻔히 알기 때문이다. 이 말을 언제 해야 할지 적절한 타이밍을 못 찾은채 얼마간 시간이 흘렀다. 이 이야기를 해도 별로 기분 나 빠하지 않을 것 같은 상황이 왔고 둘째에게 꼭 필요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야기를 꺼 냈다.
“제희야, 돈에도 감정이 있대. 자기를 반가워하지 않는 사람한테는 가지 않는대. 얼마전에 니 가 회사에서 하루 더 나와달라고 했는데 고민도 하지 않고 거절했잖아. 엄마는 그때 돈이 너 한테 섭섭해했을거 같고, 너한테는 가고 싶지 않을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내 기대와 달리 둘째가 눈이 동그레지면서 내 말을 귀담아 들었다. 그 뒤로 일을 대하는 태도 가 많이 달라졌다. 적절한 타이밍은 정확하게 알 수 없었지만 바로 말하지 않고 묵혀 두었던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말도 숙성하는 것 같다.
자녀가 어리든 성인이 됐든 부모인 내가 보기에 잘못된 행동을 할 때 바로 지적하고 싶은 마 음은 굴뚝같다. 말을 하자니 아이의 반응이 어떨지 그리고 그 뒤에 어떤 상황이 전개될지 뻔 히 알고 있으니 참을 수 밖에 없는데, 참자니 속이 부글부글하다. 특히 성인자녀는 더욱 그렇 다. 애를 잘못 키운 것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들어온다. 좀 더 엄하게 키웠어야 했는데, 좀 더 독립적으로 키웠어야 했는데, 너무 자율적으로 키웠나봐, 등등 오만가지 후회가 밀려온다. 성 인이 다 됐는데 아직도 저러고 있는 것이 한편으로는 언제 철이 드나 걱정도 되고 한편으로는 성공한 남의 집 자식들이 떠오르면서 한숨이 나온다. 비교하지 않고 키우려 애썼음에도 나도 어쩔 수 없는 엄마인가 자책이 이어진다. 하지만 한 번 참고 또 참고, 이런 인내의 시간이 지 난 후에 아이에게 작은 변화라도 생기면 어느새 뿌듯함이 몰려온다(苦盡甘來). 자식 키우는 보람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이 부모의 행복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