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며, 사랑하며, 살아가는
참 열심히 살았다. 아닌가? 내가 정말 열심히 살았나?
20대 후반의 나는 말 그대로 ‘생산적인’ 일에 내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야만 스스로 열심히 했다고 인정했던 것 같다. 미드를 정주행 한 후에는 죄책감에 시달렸고, 이따금씩 병원이나 은행에서 대기하는 시간이 세상 아까웠다. 1분 1초를 탈탈 털어 꽉 찬 하루를 보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가족이 생기고 나이가 들면서 이제는 나와 가족의 건강을 돌보고 쉬며 충전하는 안식의 시간을 갖는 것에 대한 마음의 여유가 생긴 듯하다.
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치열함 속에서 깊이 있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에 의미를 둔다.
나는 경력단절이 두려운 예비맘이었다. 내 새끼는 내 손을 키우고 싶은데 전업주부가 되는 건 패배자가 되는 것만 같은 막연한 선입견이 있었다. 그래서 출산 후 직장을 그만두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가족들 돌보기에 더 자유로울 줄 알고… 학업과 육아를 병행하느라 허덕이면서,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라’는 문구를 보면 더욱더 가족과의 행복하고 따뜻하며 여유로운 하루를 갈망했다.
그런 내가 지도교수님의 '일하는 사람의 이상형'에 관한 연구에 참여한 것은 내 삶에 매우 중대한 사건이었다. 우리 연구에서 '장인'은 누구에게나 귀감이 될만한 모든 일하는 사람들의 롤모델로서 재개념화 되었다. 그런데 그 연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나는 내적 갈등과 혼란이 심했다. 일에만 빠져서 일 속에서 행복을 경험하고 일로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되라니… 한국사회에서 여성에게, 특히 워킹맘들에게 장인이 되길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생각까지 들게 되었다. 워킹맘들이 장인정신까지 갖추면서 일해야 돼? 그게 과연 정당한가? 낮에는 대학원 수업을 듣고, 장인들을 찾아다니며 인터뷰하고, 저녁에 집에 돌아가면 허리를 부여잡고 귀가하시는 친정엄마를 퇴근시켜 드리고 나에게 껌딱지처럼 매달리는 아들을 안고 ‘나는 장인이 싫다’며 좌절했었다. 장인 같은 사람들, 소위 일을 통해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가정을 지켜준 다른 누군가(대부분의 경우 아내)가 있었던 것만 같았다. 심술이 났다.
고학력 워킹맘의 일과 육아를 다뤘던 박사학위 논문을 시작으로, 일하는 여성들에 대해 고민하고 연구해 나가면서 내 안의 지적 갈등이 점차 정리되기 시작했다.
우선, 일과 가족은 우열을 가릴 수 없이 모두 나의 정체성을 이루는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일하는 나도 엄마인 나도 모두 나의 일부이다.
또한, ‘일과 가정 양립’에 대하여 통시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과 가정의 양립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특정한 시점에 두 가지를 병행하는 현상에 주로 관심을 갖는다. 그러다 보니 어떤 시기에 경력단절의 위기가 찾아오는지, 어떤 환경에 처할 때 역할 갈등이 심한지에 대해 활발히 논의되어 왔다. 하지만 우리가 관심을 갖고 지원해주어야 하는 것은 긴 생애의 과정에서 때로는 일에, 때로는 가정에 무게를 실어가며 어느 한쪽도 포기되지 않는 장기적인 경력의 과정이다.
마지막으로, 일과 가정이 조화를 이루면서도 장인처럼 이상적인 일터의 롤모델이 되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두가 장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경지를 향해 성장해나가는 과정이다. 일 속에서 크고 작은 성취감과 인정을 경험하다 보면 돈벌이로 시작했던 일도 소명으로 바뀔 수 있고, 육아 경험이 비즈니스가 되기도 한다. 나도 내 인생의 중대한 물음표가 연구의 주제가 되기도 하고 소명이 되기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물음표에 나름의 답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쌓이면서 ‘나도 장인이 되고 싶어 졌다.’
나는 여성에게 전업(full-time work)을 강요하고 싶지 않다. 그게 정당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누구는 어쩔 수 없이 가정을 뒤로하고 노동의 현장을 향하고, 또 누구는 유급노동이 아니어도 주부로서 충분히 만족스러운 삶을 영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건 남성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일과 가정생활에 얼마큼의 물리적, 정서적 에너지를 분배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가사노동과 육아, 노부모 돌봄과 같은 가정에서의 노동이나 봉사 활동 등도 무보수일 뿐이지 넓은 의미에서 모두 ‘일’이다. 어떤 종류의 일을 하든 중요한 것은 그 경험들 속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가는가?’이다. 나에게 맡겨진 책임들 속에서 내가 점점 좋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장인처럼, 나도 행복하고 사회에도 긍정적으로 기여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박사과정을 마치고 5년이 지나가는 시점,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고 (사실 구직조차 하지 않았다) 비정규직 대학 강사로 연명하는 삶은 결코 승자의 모습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엄마 노릇하는 삶의 방식이 매우 만족스럽다. 남편이 가정의 생계를 지키는 가장 노릇을 해주고 있기에 가능한 일임도 분명하다. 주어진 여건에서 내가 개척한 나만의 삶의 방식이다. 언제 또 바뀔지 모르는… 적어도, 이렇게 남들 눈치 보지 않고 ‘나 자신과 대결(장원섭, 2015)’하면서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일에 몰입하고 내 목소리, 내 주장을 정리하고 또 그것을 실천하고 살아낸다는 측면에서 나 스스로 조금이나마 ‘장인스럽게’ 일하려고 노력한다. 여성을 일과 육아, 양자택일의 딜레마로 밀어 넣는 사회체계로부터 나는 해방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일상에서 한 가지 에러 사항이 있다. 누가 일하냐고 물어보면 순간 멈칫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 답은 상황마다 다르다. 신용카드를 발급받을 때 나는 가정주부이다. 매 학기 강의 첫날 학생들에게 나를 소개할 때 나는 연구원이다. 새로운 사람들과 만날 때는 잠시 갈등한다. 내 상황이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입도, 업무량도, 아이들을 돌볼 수 있는 상황도 때마다 다르다. 대부분의 경우, 그냥 나를 ‘대학강사’로 소개한다. 그게 추가 질문을 받지 않을 수 있는 가장 깔끔한 답이다. 그런데 조금 더 ‘있어 보이고 싶은’ 자리에서는 우습게도 ‘교육학 박사’라도 답할 때도 있다. 사실은 그게 직업도 아님에도 상대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굳이 따지자면 직장맘이겠지만, 전업 직장맘은 아니다.
나처럼 이렇게 애매하게 회색지대에 있는 여성들이(그리고 남성들도) 더욱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 늘어날 것이라 예상하고 그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전업맘과 직장맘을 구분 짓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은 나의 개인적인 경험들뿐만 아니라 지난 연구의 결과를 통해 얻은 결론이기도 하다. 내가 만나고 인터뷰한 많은 여성들의 경우 일이 곧 삶이 되기도 하고, 삶이 일을 향해 가기도 했다. 때로는 일에, 때로는 가족에, 또 때로는 자기 자신에 몰두하며 파도를 타고 서핑하듯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과 여건에 맞춰 '현대적 장인(장원섭, 2015)'처럼 자신만의 리듬을 즐기며 살고 있었다. 파도를 타지 않으면 생존이 위험해지듯, 그러한 삶의 방식은 그들이 일하는 삶을 더 오래 지속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불로소득(땀 흘려 일하지 않고 얻는 소득)을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이 급속도로 달라지고 있다. 이제 불로소득은 선망의 대상이 되어가는 듯할 정도다. 최대한 적게 일하고 많이 벌고 싶은 문화적 경향성을 실현시킬 수 있을 만큼 디지털 기술이 발전하고 있다. 디지털 노마드, 긱 워커를 넘어서서 파이어족까지 나오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는 여성의 일에도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점차 다양해지는 일의 방식들이 사회적으로 용인됨에 따라 여성도 자신의 전문성과 경험을 살려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자신만의 리듬을 설정해 파도타기가 가능해질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여성의 경력이 단절되는 문제적 현상에 집중해왔지만 앞으로는 이 것을 넘어서야 한다. 내 글이 담고 있는 연구 결과들이 여성의 일과 삶에 관한 희망과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근거이며 오늘을 살아가는 여성들, 그리고 일과 가족을 병행할 맞벌이 부부들에게 조금이나마 희망을 주었기를 바란다.
여성의 일을 위해, 일과 가족의 화해를 위해, 양성평등한 일과 가정의 양립을 위해 나는 계속 연구할 것이고, 강의할 것이고, 일상에서 영감을 얻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남편과 도움을 주고 받을 것이고, 아이들을 독립시켜 나갈 것이고, 서로를 응원하고 격려하며 우리 가족은 함께 할 것이다. 삶의 다양한 단면들이 제각각인 것 같고 무질서해 보이지만 알고보면 그렇게 정렬되어 있는 것이다. 모두 나를 이루는 조각들이 되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