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포스팅은 한국과 일본의 보행자 신호등, 그 중에서도 녹색점멸신호(깜빡이는 녹색불 신호)를 둘러싼 제도적, 문화적 차이에 대한 글입니다. 왜 '일본 신호등의 녹색불 점멸시간은 한국보다 짧을까'라는 간단한 질문에 대한 답을 많은 분들이 알기 쉽게 작성해보려 했던 야심찬 의도와는 달리 법령의 조문과 수식이 포함되어 조금은 복잡하게 느껴지실 수도 있습니다.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이 글을 읽고 싶으신 분들은 글 아랫부분의 '한국의 녹색 점멸 시간이 일본보다 긴 이유'부터 읽으셔도 무방합니다.
이전 포스팅에서 살펴보았듯, 한국과 일본의 보행자 녹색 등화 점멸 신호의 의미*는 동일합니다. 그럼 무엇때문에 한국의 녹색점멸시간은 그렇게 긴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우선 1) 보행자신호의 시간이 어떻게 구성되고 계산되는지, 2) 그 중에서도 녹색점멸시간이 어떻게 산출되는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횡단을 시작하지 않은 보행자에게는 ‘횡단 금지’를, 이미 횡단을 시작한 보행자에게는 ‘신속한 횡단 완료 혹은 횡단 중지 및 보도로의 복귀’를 알림
교통신호기 설치와 관리 - 보행자신호 시간의 산출방법
1. 한국
[도로교통법시행령] 제86조(위임 및 위탁)
① 법 제147조제1항에 따라 특별시장ㆍ광역시장은 다음 각 호의 권한을 시ㆍ도경찰청장에게 위임하고, 시장ㆍ군수(광역시의 군수는 제외한다. 이하 이 항에서 같다)는 다음 각 호의 권한을 경찰서장에게 위탁한다. (중략…)
1. 법 제3조1항에 따른 교통안전시설의 설치ㆍ관리에 관한 권한
한국에서 신호기 설치 및 관리와 관련한 권한은 [도로교통법시행령]에 따라 관할 경찰기관에 위임/위탁됩니다. 해당 경찰기관은 이 업무를 신호기의 설치기준, 장소, 운영원칙 등과 관련한 내용을 담은 [교통신호기 설치ㆍ관리 매뉴얼]에 따라 수행하게 됩니다.
우리가 궁금한 부분은 보행자 신호기의 전체 녹색 점화 시간과 녹색 점멸 시간이 어떻게 결정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매뉴얼 제3절 2 <보행자신호 시간 계획>에는 보행자 신호 중 전체녹색시간(녹색 + 녹색 점멸)의 산출방법이 나와있습니다. 다음 식이 전체 녹색시간을 산출하는 계산식입니다.
T(전체 녹색시간) = Ts + Tf = t+L/V1
이 식에서 의미하는 각 변수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T = 보행자 전체 신호시간(초)
Ts = 녹색고정시간 : 녹색등화가 지속되는 시간(초)
Tf = 녹색점멸시간 : 녹색등화 이후에 녹색등화가 점멸되는 시간(초)
t = 초기진입시간(4-7초)
L = 보행자 횡단거리(km)
V1 = 1.0m/s
정리하면 전체녹색시간은 점멸하지 않는 녹색고정시간과 녹색점멸시간으로 구성됩니다. 또 이 시간은 횡단보도에 진입하는 4~7초의 시간과 전체횡단거리를 1.0m/s의 속도로 횡단한다고 가정할 때 걸리는 시간의 합과 같습니다.
그런데 녹색등 점멸이 더이상 횡단보도를 건너지 말라는 의미이니, 점멸 시 보행자 속도를 일반 보행자의 보행속도로 가정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보행자가 조금은 서둘러 건넌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녹색점멸시간은 일반 보행속도보다는 빠르되, 조급함을 느끼지 않도록 1.3m/s정도의 걸음을 기준으로 합니다.
Tf(녹색점멸시간) = L/V2**
**V2 =1.3m/s
예를 들어 26m의 보행자 횡단거리가 있다고 하면 이 횡단거리 보행자 신호기의 전체녹색시간은 어떻게 될까요.
- Tf = 26/1.3 = 20(s)
- Ts = {(4~7s) + 26/1.0) - 20 = 10~13(s)
- T = Ts + Tf = 30~33(s)
20초의 녹색점멸시간과 10~13초의 녹색고정시간의 합인 30~33초 정도가 전체 녹색시간으로 주어지게 됩니다.***
*** 어린이보호구역, 노인보호구역 등 교통약자를 위한 보행신호 운영 시에는 1.0m/s보다도 더 느린 0.7m/s 정도의 보행 속도를 고려해 신호시간을 운영하기 때문에 위 계산결과와 실제 운영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 일본
道路交通法(도로교통법) 제5조(경찰서장 등에의 위임)
① 공안위원회는 정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제4조제1항에 따른 보행자 또는 차량 등의 통행의 금지, 그 밖의 교통 규제 중 적용기간이 짧은 것을 경찰서장에게 하도록 할 수 있다.
② 공안위원회는 신호기의 설치 또는 관리와 관련된 사무를 정령으로 정하는 자에게 위임할 수 있다.
일본의 경우도 간단히 살펴볼까요. 일본 역시 경찰에 신호기 설치 및 관리 권한을 위임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도로교통법] 제5조 (경찰서장등에의 위임)은 공안위원회가 신호기의 설치 또는 관리와 관련된 사무를 정령으로 정하는 자에게 위임할 수 있도록 하고 있고, 이를 근거로 각 도도부현에 설치되는 신호기와 관련해서 현경찰이 해당 지방의 공안위원회로부터 신호기 관리 사무를 위임받아 집행합니다.
일본에서 보행자 횡단보도에 설치되는 신호기의 신호길이를 정할 때 기준이 되는 일반적 보행속도 역시 1.0m/s입니다. 한국과 비슷하게 횡단보도의 길이, 고령자 혹은 신체가 불편한 보행자의 이용빈도 등을 추가적으로 고려해 전체녹색시간을 결정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녹색 점멸시간이 전체녹색시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국과는 달리, 일본 보행자 신호기의 녹색 점멸시간은 일반적으로 4~10초입니다. 횡단거리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한국에 비해서는 매우 짧은 편입니다.
한국의 녹색 점멸 시간이 일본보다 긴 이유
겉으로만 본다면 한국 보행자 신호기의 긴 녹색점멸시간은 도로교통법을 잘 지키지 않는 듯합니다. ‘더 이상 횡단보도에 진입해서는 안된다’는 의미를 지닌 녹색점멸시간이 전체녹색시간의 많은 부분을 차지 하니까요. 그런데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과 일본의 신호등 녹색 신호의 차이는 그 나라가 보행자의 안전을 생각하고 보호하는 방식에 있습니다.
일본은 녹색점멸신호의 의미 자체에 집중합니다. 이미 횡단 중인 보행자에게는 서둘러 횡단을 완료하게 하고, 아직 횡단을 시작하지 않은 보행자에게는 횡단보도에 진입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보호합니다. 일본의 녹색점멸신호는 ‘다급한 알림’에 가깝습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녹색점멸신호를 길게 설정하는 것은 의미가 없겠죠. 보행자들을 멈춰세우기 위해서 점멸신호를 만들었는데 여유있는 시간으로 신호를 운영하면 보행자들은 조금만 급해도 너도나도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할테니까요. 즉, 일본은 곧 적색등화로 신호가 바뀔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 보행자들을 멈춰세우는 데에 초점을 두고 신호기를 운영합니다.
이에 비해 한국은 보행자, 즉 신호 이용자들에게 녹색점멸신호로 ‘곧 적색등화로 바뀔 것’임을 알리는 동시에 그들이 편안하게 횡단보도를 건널 수 있도록 배려하는 방식으로 신호를 운영합니다. 짧은 녹색점멸시간은 효과적으로 적색등화로의 신호변경을 알릴 수 있지만, 현재 횡단 중인 보행자에게 적지 않은 심적 부담을 필연적으로 안깁니다. 지금보다 훨씬 서둘러야 할 것 같은 조급함을 느끼게 할 수 밖에 없죠. 그래서 이를 방지하고자 점멸시간을 조금 더 늘려 보행자 녹색 신호에 횡단보도에 진입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횡단하지 말 것을 알리고, 이미 진입한 보행자들은 점멸로 인해 조급심을 가지지 않고 안전하게 횡단을 완료할 수 있도록 신호를 운영합니다. 실제로 경찰청의 [교통신호기 설치ㆍ관리 매뉴얼]에는 보행자신호 시간 구성과 관련하여 녹색점멸신호의 역할을 1) 횡단보도에 진입하지 않은 보행자의 진입을 막고, 2) 많은 신호 이용자들이 조급심 없이 편안하게 횡단보도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그 운영원칙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어느 나라의 신호기 체계가 우월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각 나라의 실정과 국민정서에 맞도록 시행착오를 거쳐 확립된 운영방식일테니까요. 제가 지내본 바로는 한국 사람들에게는 한국의 신호등이 잘 맞고, 일본 사람들에게는 일본의 신호등이 잘 맞는 듯 보였습니다. 저에게도 한국의 신호등이 더 잘 맞습니다.
나고야의 한적한 도로(2017)
휴가철과 방학을 맞아 요즘 일본 많이들 가시더라구요. 일본에서 길을 건너실 땐 이것 하나만 기억해주세요.
횡단보도 신호등의 녹색불이 깜빡인다면, 잠시 멈춰가셔도 좋습니다.
끝내며)
제가 평소에 신기해하던 사실에 이것저것 찾아보며 살을 덧대 글을 써보았습니다. 저도 글을 쓰면서 더 많이 배울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좋은 반응을 보여주셔서 행복합니다. 쉽지 않은 내용을 쉽게 전달하는 것이 글을 쓰는 사람의 의무라고 생각하는데, 앞으로 더 노력해 많은 분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주기적으로 한국과 일본의 재미있는 문화차이에 대한 글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끝-
*참고
- [교통신호기 설치ㆍ관리 매뉴얼] - 경찰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