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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돈 Sep 28. 2022

가을아, 내 맘 너무 흔들지 마  

by 맑은 눈

아침, 잠에서 깨어 눈을 비비며 소파에 앉았다. 끈적거리던 소파가 다소 차갑게 느껴지고 공기도 제법 선선하다. “백로”를 지나 "한로"눈앞에 두고 있으니 계절이 바뀐 것이 맞는 듯하다. 그러고 보니 시끄럽게 울어대던 매미소리도 귀뚜라미 소리로 대체된 지 꽤 되었다. 가을이 찾아온 것이다.


가을이란 단어만으로 마음의 끈을 놓아버린다. 이맘때면 늦더위에 개울가에 가방을 쌓아놓고 친구들과 물장구를 치며 물방개를 잡고 놀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걱정거리는 젖은 옷과 신발뿐이다. 초등학교 뒤편에 있는 동산에 올라 작은 나뭇가지 위에 여기저기 젖은 옷과 신발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개구쟁이 친구들과 누워서 키득키득 거리며 바라보던 가을 하늘을 잊을 수가 없다. 하늘은 맑고 깨끗했다. 너무 푸르다 못해 파란 바닷물이 내 몸 위로 쏟아질 것만 같았다. "이때다" 하면서 어디선가 살며시 바람이 스치면 까무잡잡한 얼굴에 해맑은 미소가 번졌다. 눈부신 하늘과 흰 구름, 그리고 간질이는 바람이 한꺼번에 말을 걸어오면 나는 차마 대답을 못하고 눈을 감아버렸다. 잠시 후 눈을 찡긋이 뜨고 속삭였다. “아직 어린 꼬맹이니까, 내 마음 너무 흔들지 말라고. 내 마음이 베이면 나도 어쩔 수 없다고”. 그리고서는 스르르 곯아떨어졌다.


조그마한 앞마당에는 오이와 토마토가 익어가고, 제법 빨간 고추가 고개를 내미는 사이사이에 껑충한 코스모스가 여기저기 모여 있다. 학교로 가는 길목인 신작로 주변에도 하얀색, 빨간색의 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속삭이고 있다. 그 길을 따라 "준비, 요이 땅" 하면서 달리기 솜씨를 겨루기도 했다. 장난기가 발동하면 녀석들과 꽃 위에 앉아 있는 꿀벌을 잡아 벌침을 뽑곤 했다. 가끔 용돈을 주신다는 어머니 심부름으로 동생을 데리고 코스모스 씨를 받으러 갔다. 코스모스 씨를 가을 햇볕에 말린 후 이듬해 앞마당에 있는 화단에 씨를 뿌리곤 했다. 요즘은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또 결과를 바로 볼 수 있다. 정보는 차고 넘치고 사람들은 걸어가면서까지 궁금증을 해소하는 정보화시대다. 이러한 세태 속에서는 두 해에 걸쳐 얻어지는 자연의 아름다움은 퇴색해버렸다. 오히려 빠른 변화와 그로 인한 불안감, 그리고 조급함이 더해질 뿐이다. 그래서인지 무뎌진 마음을 추스르며 속삭이고 싶은 그 하늘과 그 길이 떠오른다. 아니 어쩌면 그즈음 가을이 그리운 것인지 모른다.


학교 뒷동산에 올라 여기저기 널려있는 이름 없는 산소 옆에 자리를 펴고, 넥타이를 풀어헤치고 싶다. 구두를 벗고 팔베개를 하고서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하지만 이미 동산의 풀과 나무는 뭉떵뭉떵 베어져 버렸고, 그곳에는 성냥갑처럼 답답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으니.. 어린 시절 기억 속 그리운 장소를 잃어버렸다. 어린 시절 감성을 흔들어 흘러넘치게 했던 아름다운 그 하늘과, 신작로를 따라 내 키만 한 코스모스가 속삭이던 그 길은, 꿈속에서나 찾아가 봐야겠다.

(2022.09.28. 맑은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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