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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눗씨 Oct 29. 2024

늙은 막내 작가의 입봉 대작전

큐시트가 뭔가요?

대학때 <SBS 아빠의 도전>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아빠가 어떤 미션에 도전해서 성공하면 가전 및 가구를 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그 프로그램에 우리 가족이 출연을 하게 되었다. 우리 아빠는 병에 공기를 넣고 그 공기로 초 15개를 끄는 미션이 주어졌다. 피디님이 며칠동안 우리집으로 촬영을 오셔서 아빠의 폐활량 늘리는 운동, 가족들의 응원 등을 촬영하셨다. 피디님은 촬영구성안을 눈으로 훅 한번 보더니 뒷주머니에 꽂아두고 피디님의 구성대로 촬영을 진두지휘했다.  그분은 일하면서 대학원에서 꾸준히 공부하며 책도 내고 대학에 강의도 다니는 성실하신 분이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 멋있었고 본받고 싶었다. 피디님을 존경해서 쭉 그 인연을 이어나가 몽골에 가서도 한국에 돌아와서도 계속 연락하며 지냈다. 


피디님은 막내를 하기엔 나이가 많은 나를 안타까워하셨다. 아직 막내 작가인 나에게 항상 '이작가'라고 불러주며 '빨리 입봉을 해야 하는데.'걱정해주셨다. 입봉은 나의 코너, 프로그램을 맡아 아이템 선정부터 섭외, 원고까지 책임지는 진정한 작가가 되는 것이다. 방송바닥은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대부분 인맥으로 프로그램을 옮겨다닌다. 워낙 일이 힘들다보니 메시지 하나 보내고 다음날부터 안나오거나, 방송 전날 잠적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아는 사람에게' 검증된 인재(?)를 쓰고 싶어한다.  피디님은 나를 <KBS활력충전 530>이라는 프로그램에 소개시켜 주셨다.  그 프로그램이 입봉하기에 좋은 조건, 즉 짧은 꼭지 코너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피디님 소개로 들어간 자리여서 폐가 되지 않도록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인수인계를 받기 위해 방송 전날 사무실로 출동했다. 메인 작가님은 나에게 ‘큐시트’샘플을 주시곤 다음날 방송 ‘큐시트’를 만들라고 하셨다. 인수인계를 받을 땐 그 전 작가가 전체적인 시스템이나 자료 등을 넘겨줘야 하는데, 이상하게 이곳의 막내작가는 그림자같았다. 아무도 말을 걸지 않고, 그녀도 나에게 그 어떤 정보를 주지 않았다. 나는 고민했다. ‘큐시트가 뭘까?’ 안그래도 낯가려서 모르는 사람에게 쉽게 말도 못 거는데, 방송 전날이라 다들 너무 바빠 누구에게 물어볼 수 조차 없었다. 모두 정신없는 가운데 ‘큐시트’ 라는 걸 해독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눈물이 나오려는 찰나 카메라 렌탈 업체 직원이 들어왔다. 마침 아는 분이어서 ‘나 좀 도와달라고’붙잡았다. 그 직원은 본인도 잘 모르겠다며 돌아갔다. 그때는 누구에게라도 매달리는 심정으로 그 분에게 물어봤는데, 지금 생각하면 카메라 렌탈 직원은 모르는 게 당연했다. 결국 메인 작가님에게 첫날부터 혼나고 둘째 작가님에게 가까스로 배웠다. ‘큐시트’는 생방송이나 녹화방송 때 시간, 순서, 출연자 등을 상세하게 적어둔 표다. 

‘방송 아카데미’를 나왔으면 당연히 아는 ‘큐시트’를 국문과만 나오고, 그동안은 다큐멘터리만 해서 스튜디오물을 해본 적 없던 나는 생전 처음 보고, 들은 것이다. 


눈물의 신고식을 톡톡히 치룬 후, 일주일마다 한편의 생방송을 해치우며 더 혹독한 방송을 경험했다. 생방송은 실수를 용납하지 않았다. 일주일마다 아이템선정, 섭외, 촬영, 편집, 원고, 자막 등을 해내야 하는 스케줄은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강도가 아니었다. 막내인 나는 모든 작가님의 섭외, 촬영 준비 등을 돕고 이외 잡다한 방송 준비를 해야 했다. (시청률 정리, 출연자 차량 등록, 아이템 정리 등등)

메인 작가님은 내가 한달도 못버티고 도망갈 줄 알았다고 한다. 실제 내 앞에 두 명의 막내 작가가 이곳을 거쳐갔다. 한 명은 방송 한편 하고 난 후 도망갔고 또 한 명은 일주일만에 백기를 들었다. (인수인계하러 간 날, 막내 작가가 그림자였던 이유다.) 이 프로그램이 생기고 세 번째 막내작가가 나였다. 나의 장점은 좋은 머리도 아니요. 강한 체력도 아니요. 바로, 깡따구였다. 첫날의 치욕을 이겨내고 무려 두달 넘도록 버티고 있는 나를 어여삐 여긴 메인 작가님은 27살에 아직도 막내 타이틀을 쥐고 있는 ‘늙은 막내’를 입봉 시키기로 했다.

우리 프로그램에는 <말말말>이라는 5분짜리 꼭지가 있었다. 연예인이나 유명인들이 했던 핫한 말을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코너였다. 주로 자료 편집으로 만들어 내는 코너인데 아이템 컨펌 후,  자료 찾고 편구 쓰고 그 편구를 바탕으로 피디가 편집을 하면 함께 고치고 원고 쓰면 끝이었다. 그런데 스킬이 부족한 나는 막내 업무에 <말말말> 코너까지 하려니 매일이 밤샘의 연속이었다. 

구성을 이렇게 하는 게 맞는지? 이 그림이 들어가는 게 적당한지? 원고 쓸 때 멘트가 뭔가 어색한데 어떻게 고쳐야 할지 난감했다. 메인작가님도 고생이었다. 내가 새벽 2시 ~ 4시 사이 편집구성안을 써서 메인 작가님에게 보내고 톡을 보내놓으면 잠도 안주무시고 계셨는지 메인작가님은 바로 읽어보고 피드백을 주셨다. 그땐 메인작가라는 위치가 당연하게 후배들의 원고를 봐주고 피드백을 해주는 걸로 알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선배 작가는 귀한 존재이고, 작가님이 그만큼의 시간과 애정으로 나를 키워주신 걸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15년간 방송작가로 먹고 살게 해준 건, 8할이 그때 메인작가님 덕분이었다. 

그렇게 작가님과 새벽까지 트레이닝을 몇달 하자 조금씩 구성에 감이 잡혀갔다. 나중엔 작가님이 컨펌 안받아도 된다며 자율적으로 할 수 있게 맡겨주셨다. 그리고 나에겐 허용되지 않을 것 같았던 작가 ‘선배님’이라는 호칭을 뛰어넘어 ‘언니’라고 부르게 되었다. 눈이 안좋아져 방송 바닥을 떠난 그 ‘작가 언니’는 나에 하나뿐인 ‘사수’다. 그리고 나의 입봉작인 <KBS 활력충전530>은 시청률 저조로 인해 다음 개편때 막을 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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