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 몸 기꺼이 바치겠나이다
EBS 다큐멘터리 <리얼실험 프로젝트 X>의 막내 작가가 되었다. ‘PD – 메인작가 – 막내 작가 – 조연출’ 이렇게 한 팀이 되어 프로그램을 만들어 냈다. 나의 주 업무는 출연자 섭외, 장소 섭외, 홍보문 쓰기, 그리고 프리뷰였다. 프리뷰는 PD가 촬영해 온 테이프를 보며, 장면과 말을 있는 그대로 타이핑하는 것이다. 한번 방송 분량에 1시간짜리 테이프 50개~80개 정도 되는 걸 PD가 편집하기 전까지 모조리 타이핑해서 준비해 놓아야 했다. 모두 타이핑하면 두툼한 책 한 권이 만들어진다. 요즘은 대부분 전문 프리뷰어를 쓰거나 간단한 건 클로버 노트를 이용하기도 한다. 그때는 일명 ‘도시락’이라고 부르는 ‘데크’를 밤낮으로 끼고 살며 프리뷰를 했다. 매일 밤새 책상에 앉아 계속 화면만 보고 손가락만 움직이고 있으니 ‘토’나올 지경이었다. 그때는 이렇게 비효율적인 일이 없다 생각했다.
프리뷰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힘든 일은 방송 자막을 치는 것이다. 1시간짜리 영상 자막을 밤을 꼴딱 새우며 아침까지 써내야했다. 몽롱한 가운데 맞춤법을 틀리지 않고 꼼꼼하게 해야 한다. 어떤 막내 작가는 장소 자막에 ‘전라남도 순천시’를 ‘전라북도 순천시’라고 적어서 방송 사고가 난 적이 있고, 나는 다른 방송도 아닌, 한글날 특집 다큐멘터리에 자막 맞춤법이 틀려 내레이션을 한 (한글 홍보대사)아나운서부터 작가님, 피디님, 대표님에게까지 화살을 맞고 너덜너덜해졌다.
그때 내 나이 25살이었고, 메인 작가님은 50살이 넘은 분이어서 모르는 게 있어도 물어보기 어려웠다. 대선배 중에 대선배. 신같은 존재였다. 게다가 나는 막내치고는 나이가 많은 편이었다. 전문대 졸업하고 온 막내는 22살이었고, 나보다 나이가 적은데 선배인 경우가 많아 나는 항상 위축되어 있었다. 나에겐 어려운 50대 넘은 메인 작가님을 문예창작과 출신 막내들은 선배님이라고 불렀다. 나는 그게 참 부러웠다.
막내의 길은 암울 그 자체였고, 방송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니 매일 혼나고 자존감은 발바닥에 붙어 다녔다. 쓰고 싶은 글은 쓰지도 못한 채 테이프만 주구장창보고, 남에게 부탁의 말을 해야 하는 섭외도 고역, 밤새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싶었다. 우리는 힘듦을 장난과 웃음으로 견디며 점심에 시켜먹는 깐쇼새우에 털어냈다.
그래도 인복이 있었는지 방송에 '방'도 모르는 나를 친절하게 가르쳐준 분이 있었다. 다혈질 피디님들 사이에 유일하게 다정하고 따뜻한 분이었다. 독립영화를 만들던 감독님이었는데 영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우리 프로그램에서 다큐를 만들며 알바를 했다. 엄청 꼼꼼하고 아이같이 해맑은 분으로 가끔 그분이 쓴 시나리오를 읽어볼 기회가 있었는데 시나리오에 섬세한 장면 묘사, 따뜻한 대사가 그대로 들어가 있어‘영화감독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생각하며 존경스러운 마음을 품었다. 가끔 기사로 감독님의 소식을 접하거나 영화 광고판을 볼 때마다, 그리고 감독님의 영화를 볼 때마다 감독님의 다정한 말투와 행동, 웃는 모습이 생각났다.
그리고 편한 30대 피디님들과 조연출, 같은 막내 작가들과 힘듦을 서로 견디며 친구처럼 친해져 감옥같은 그 안에서 똘끼짓하며 노는 게 사는 낙이었다.
작가가 되려고 왔는데 내 생각대로 쓰는 거라고는 홍보문밖에 없어 항상 마음속엔 내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과 조급함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메인 작가님이 1시간짜리 원고를 모두 쓰고 난 후 잠이 드셨다. PD는 빨리 다음편 예고 멘트를 써서 보내라고 계속 전화를 했다. 작가님은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못하고, PD는 화가 나서 고래고래 소리지르다 “야! 니가 써서 보내!”라고 말하더니 전화를 끊어 버렸다.
나는 작가님이 예전에 썼던 예고편 원고를 열어 보았다. ‘장면 옆에 저 숫자는 무엇인가?’머리를 쥐어짜며 작가님의 원고를 해독했다. 이제 나의 차례가 되었다. 1분짜리 영상이 1시간처럼 느껴졌다. 일단 어찌 저찌 써서 보냈다. 한참만에 작가님이 일어나셨고 나는 난리법석 상황을 보고한 후, 나의 예고 원고를 보여드렸다. 작가님은 아무렇지 않게 “잘썼네. 예고 원고는 이제 니가 써!”라고 하셨다. 머릿속에서 팡파레가 울려 퍼졌다. 쥐가 났던 머리가 스르르 풀리는 기분이었고, 글을 쓰고 느낀 첫 희열이었다.
일은 익숙해져서 프리뷰와 예고 등을 좀 더 빠르게 해치울 수 있게 되었다. 촬영장에 가서 출연자들을 만나는 것도 즐거웠고, 점점 이 프로그램에 녹아 들었다.
그러다 ‘대장암’으로 투병 중이던 할머니에게 마지막 인사를 해야 한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대표님과 작가님께 사정을 말씀드렸다. 그런데 대표님이 갑자기 화를 내며 ‘그럼 니가 하던 일은 누가 하냐’며 몰아 붙였다. 나는 심장이 마구 뛰었다. 나는 내가 뭘 잘못한건지, 이렇게 혼나야 하는 상황이 납득이 안갔다. 그때는 다른팀이 방송 준비를 하고 있었기때문에 그리 급한일이 없었다. 대표님 앞에서는 꾹 참았다. 그리고 내 노트북을 싸서 나오며 택시 안에서 꺼억 꺼억 울었다.
그로부터 몇 달 후, 나는 대표님의 얼굴을 볼때마다 그때의 아픔이 생각나서 더 이상 이곳에 있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조직을 배신한 댓가인 양 "너 이바닥에 내가 아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니가 다른 프로그램 갈 수 있을 것 같아?"라는 협박이 돌아왔다. 그렇게 욕을 한바가지 얻어 먹고 나서야 그곳을 그만둘 수 있었다. 다행히 손가락 하나는 내놓지 않아도 되었다. 가끔 막내작가는 윗분들의 감정쓰레기통이 되기도 하고, 가끔 인간이하의 취급을 받기도 했다. 그 부당함을 그때는 이야기 할 수 없었다. 내 방송 생활이 이 분들로 인해 끊겨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기때문에. 그래서 2008년 8월 28일. SBS 막내 작가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을 때 우리는 그녀의 아픔. 고통을 느끼며 숨죽여 울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