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바닥은 '술꾼들이 모여사는 이상한 나라'다. 음주가무에 능하지도 않고 포커페이스도 안되는 나는 '이 나라에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했던 적이 종종 있었다. 나혼자 미운오리 새끼처럼 어울리지 못해 어색하게 있던 프로그램은 <MBC 기분좋은 날 – 연예플러스 >라는 프로그램이다. 연예정보프로그램으로 예능과 교양 작가의 경계라고 보면 된다. 연예계 소식을 연예부 기자가 알려주는 방식이었는데, 예능은 아니었지만 반은 예능 반은 연예정보 작가로 포진되어 있었다.
이 어색한 프로그램에서 내가 주로 맡은 코너는 드라마 담당이었다. 그나마 연예인들을 잘 모르는 나에게 드라마는 할만한 일이었다. 인기있는 드라마 제작발표회 취재 후 드라마 소개와 함께 버물여 만들거나 시청률이 잘 나온 장면 위주로 편집해서 드라마 내용을 짜집기했다. 주 시청층이 주부였기때문에 막장드라마, 악녀, 불륜, 김치 싸다구(?)같은 장면이 단골 메뉴였다. 주제도 <청춘보다 더 독한 중년의 베테랑 훼방꾼!>이런 것들이 시청률이 좋았다. 섭외는 일반인 섭외보다는 조금 수월했지만 가끔 연예인보다 더 연예인같은 매니저들을 대해야 할때 피곤했다. 섭외가 안되면 초콜릿을 사들고 촬영장에 가서 직접 섭외하기도 했다. 제작발표회 촬영, 광고, 영화 영상 등 자료를 받고 연예인을 섭외하는 건 작가의 능력이었다. 영화나 드라마 홍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대부분 자료나 인터뷰는 수월했다. 섭외가 안되는 건 결혼식(비공개가 많다) 또는 나쁜일로 방송에 나가는 경우였다.
드라마 촬영 현장 스케치는 드라마 방영 되기 전 우리 방송에서 먼저 나가지 않는 다는 조건, 또는 방영 전이어도 중요 장면은 나가지 않는 다는 조건으로 나갈 수 있었다. 무리하게 방송에 내보낼 필요가 없었기에 조율이 어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정말 인터뷰를 하고 싶은 분을 섭외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연극판에서도 유명하고 배우들에게도‘선생님’이라 불리는 배우님 중에는 절대 인터뷰를 해주지 않는 분들이 있다. 처음에는 ‘좀 해주지 너무 한 거 아니야?’라고 생각했다. 촬영장에 가서 봐도 표정이 너무 권위적이고 무서워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 알았다. 그 분은 연기에 진심이고, 무엇하나 작은 거라도 연기에 방해되는 요소를 만들지 않으려고한다. 드라마를 할때는 언제나 본인의 역할에 대한 감정선을 유지하고 싶었던 것이다. 섭외를 못해도 촬영장은 언제나 재미있었다. 배우들이 NG를 낼 때 하는 버릇이 재미있었고, 얼굴은 화사하게 예쁜데 (*남자배우인데 예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길고긴 야외촬영으로 시커멓게 탄 배우의 발을 발견했을 때. 그 발이 인간적이고 귀여워서 혼자 피식 웃음지었다.
그중 먹는 씬 찍는 게 가장 흥미있다. 우리가 보는 드라마는 길게 이어진 것들을 보지만 교양 방송이건 드라마 건 실제 촬영은 편집을 위해 다른 각도로 여러번 찍는다. 그때마다 같은 반찬을 먹어야 하기때문에 촬영장에서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진 밥상에서도 배우들은 어느 반찬을 먹었는지 헷갈리지 않기 위해 왠만하면 같은 반찬만 주구장창 먹는다. 그리고 촬영 소품용 음식들은 대부분 식어서 맛이 없다. 우리집 아이가 드라마를 보며 "맛있겠다."얘기하면 나는 "다 식어서 맛이 없어. 봐봐 밥에 모락모락 김이 안나지?"하고 얘기하면 아이는 재미있어한다. 드라마 촬영 현장의 모습을 보는 게 내가 이 프로그램을 하며 찾은 즐거움이었다.
또 원고와 자막 뽑는 것도 재미있었다. 시청자들 대변인 느낌으로 시원시원하게 써주기도 하고, 재미 자막, 이모티콘을 마음껏 넣어도 어색하지 않았다. 시사.교양 방송에서는 쓸 수 없었던 '샷 업?!' 같은 표준어가 아니어도 허용되어 쓸 수 있는 말들이 많았는데, 오히려 이때 자막과 원고 실력이 늘었던 것 같다.
이 방송을 하며 힘든 달은 연예인 괴담으로 불리는 11월부터 연말 시상식이 즐비한 12월, 그리고 새해다.
날이 쌀쌀해지는 11월. 겨울의 연예정보 작가들은 일에 치이고 슬픔에 치이는 잔인한 겨울이었다.
11월에는 유독 자살, 사망하는 연예인들이 많았고, 갑자기 유명인의 죽음을 접하면 어느 병원에 안치되었는지부터 경찰, 의사 소견 등을 알아내야 했다. 심적으로도 작가들은 한번쯤 인터뷰해본 분, 또 한번쯤 촬영장에서 봤던 분. 그것도 아니면 TV에서 접했던 분이었기에 힘든 경우가 많았는데, 유명인의 죽음 등을 마주하면 기분이 한없이 우울해지고 슬픔의 늪에서 허우적됐다. 연예정보를 그만 두고 난 후에도 배우분의 안좋은 소식을 접하면 찰지게 해줬던 인터뷰, 그분의 웃음소리가 생각나서 마음으로 슬픔을 삼키고 부디 좋은 곳에서 편안하시길 기도하게 된다.
매해 방구석에서 보던 연말 시상식은 누구도 집으로 귀가하지 못하고 사무실을 지키며 어떤 배우가 상을 받을지 예상해서 미리 자료를 마련해 두고 긴장하며 지켜본다. 방송 작가는 남들 다 쉴때 쉬지 못하는 직업군 중 하나다. 누군가 '이날 쉬는 날인데 너는 안쉬어?'하고 물으면 '그날이 쉬는 날이어도 방송은 쉬지 않잖아요.'라고 얘길하면 금방 이해하고 끄덕였다.
12월 31일 또한 모든 작가가 사무실에 모여 밤새 숨죽이는 날이다. 이번에는 디스**가 어떤 연예인의 열애설을 터뜨릴까 긴장했다. 열애설이 터지면 자료 수집부터 두 사람의 접점을 찾느라 동분서주다. 거의 예상치 못한 경우가 많았고, 그때마다 디스**의 위대함을 느꼈다. 그렇게 작가들의 새해는 갑자기 터진 연예인의 열애설로 대환장 잔치를 하는 날이다. 연예 정보 프로그램은 시의성에 맞는 아이템을 내보내야 하는 경우가 많아원래 준비했던 아이템을 뒤로 미루고 교체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계획적으로 일하는 나는 다른 프로그램보다 스트레스가 훨씬 심했다. 감정 소모 또한 다른 프로그램에 비해 두 배는 더 심했던 곳을 이력서에 제대로 된 한줄을 남기기 위해 버틸대로 버틸수밖에 없었다. 연예정보프로그램은 나에 애증의 프로그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