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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ra Seed Aug 24. 2022

마흔넷, 학생 그리고 여름방학

 결혼 십 년 차, 부부가 유학을 왔습니다.

기분이 개운치 않다.

좋아하는 커피를 마셔도, 쇼핑을 해도, J와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도 기분이 나이지지 않는다.


왜일까?

거실과 테라스의 창문을 활짝 여니

하염없이 돌아가는 에어컨 실외기 뒤로 맞은편 건물의 아치형 루프탑이 보인다.

부드러운 곡선 안에 장식적으로 배치된 클로버 문양을 보고 있자니 불편했던 마음이 조금 사그라든다.


부다페스트로 이주를 한지 일 년이 지났고, 그동안 대학원 두 학기를 무리 없이 마쳤다.

겨울방학은 고작해야 2~3주(학생의 기말 페이퍼와 시험 일정에 따라 상이하다)여서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일 년을 보내고 찾아온 나의 여름방학!

게다가 유럽의 여름방학은 장작 3개월이다. 근 20년 만에 여름방학을 맞아 설레었다.

Yes! 일 년의 1/4이 공식적인 휴가인셈이다!  직업이 학생이니 방학은 휴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일 년에 고작 보름 정도를 휴가로 보낸 직장인의 삶, 자영업의 삶을 살아본 이라면 3개월의 합법적이고도 공식적인 휴가에 설레지 않을 리 없다.


20살에 맞는 여름방학과 44살에 맞는 여름방학은 다를 것이라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나는 심지어 20살 때보다 더 들뜨고 더 설레어했다. 하고 싶은 일들이 어찌나 많은지 방학에 할 일이 빼곡했다. 이사, 운동, 여행, 논문,  헝가리어 공부, 글쓰기, 철학 스터디. 등등


그런데 뭘 했다고 벌써 8월 말이지?

다음 학기 수강신청을 하다 보니 급 자괴감이 몰려온다.

논문은 찔끔, 한 챕터 정도 정리해 놓은 게 다고, 여행은 6월 말 이태리 남부의 항구도시 바리에 다녀온 게 전부다. 그것도 유럽의 폭염에 시달리다, 결국 여행 마지막 날에 열사병에 걸려 고생한 기억뿐. 공부할 때 20대와 체력 싸움에서 지지 않게 올여름 근육이라는 것은 만들어 보고자 했으나... 여전히 건재하는 나의 말캉말캉한 살들.

아, 그래도 한 가지는 해 놓았다. 이사!

일 년 월세 계약이 종료되었고, J와 나는 심사숙고해서 부다페스트의 도심에 우리의 보금자리를 찾아 이주를 했다. 물론 이사를 하는데, 우리의 모든 여름방학을 헌정했다고 해도 과하지 않을 만큼 고생과 시간을 소비했다. 그렇게 6월부터 시작된 이사 준비는 8월 말이 되어서 거의 끝이 보이고 있다.


다를 줄 알았는데  똑같다.

20대의 여름방학과 40대의 여름방학은

변하지 않는구나..

20년 전에도 여름방학 전에는 계획 잔뜩 세워놓고 결국 친구들이랑 놀고, 먹고, 까르르 하다가 세월 다 보냈는데. 이번에도 역시.


그래, 잘 쉬고 잘 먹고 아프지 않았으면 됐지 뭐. 원래 방학이란 게 충전하라고 쉬라고 있는 게 아니던가?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남은 2주의 여름방학,

더 알차게 쉬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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