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국 방구석 주부 Sep 07. 2022

그래도 주말엔 유재석 님이지!

D+33 (sep 3rd 2022)

어렸을 적 어학연수를 할 때, 한국 콘텐츠는 영어 공부를 하는 학생들의 공공의 적이었다. 고작 1년이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게 되기 위해, 한국어를 듣고 말할 기회를 줄이는 건 어학연수생에게는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아내는 이십 대 초반에 뉴질랜드에서 어학연수를 했고, 동양인을 찾아볼 수 없는 오지로 가서 주중에는 한국 노래조차 듣지 않으면서 열심히 영어 공부를 했다. 그러다가 주말이 되면 봉인했던 한국 노래가 들어간 MP3 플레이어를 틀어놓고 몰래 눈물 지었다던 추억을 지금도 꺼내곤 한다.


나는 조금 뒤늦은 이십 대 후반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어학연수를 시작해, 자연스럽게 석사 유학을 이어갔다. 나도 어학연수 때는 한국 콘텐츠를 보지 않으려 애쓰고, 외국인들만 만나서 이야기하려고 애썼다. 특히 나는 미국으로 오기 직전까지 방송국에서 일했던지라, 방송 프로그램을 보면 한국이 더 그리워질 것 같았기에 더 피한 부분도 있다.


석사 유학을 시작하면서부터는 그런 노력을 할 필요가 많이 줄어들었다. (영어를 그만큼 잘하게 된 것이 아니라, 영어를 못해도 적응이 되어서 스트레스를 덜 받을 뿐이었다) 주말만 되면 한국의 예능을 틀어놓고 아침을 시작하곤 했다. 당시에 토요일 아침(현지 시간)을 책임져준 방송은 바로 M 본부의 ‘무한’하게 ‘도전’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아침에 느지막이 일어나 늦은 아침을 준비하면서 웹하드에서 프로그램을 다운로드하면, 아침 식사와 함께 방송을 즐기며 무료한 주말을 채울 수가 있었다.


유학 후반에 결혼하고 인턴 생활을 할 때도 주말 한국 예능 프로그램 시청은 이어졌다. 막판 6개월 동안은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뉴저지로 이주해 생활했었는데, 그땐 정말 한국 예능을 보는 때만이 유일하게 웃는 시간이었을 정도로 힘든 나날들을 견뎌야 했다.


10년이 지나 다시 온 미국 생활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은 것 같다. 출연자들 중에는 낼모레 사십이라 놀리거나 놀림받았던 분들 모두 오십을 훌쩍 넘으셨고, 활약하는 방송도 달라졌지만, 여전히 그분들이 나의 주말을 책임지고 유쾌하게 만들어 주고 계신다.


특히 유재석 님은 우리 가정의 화합과 화목과 웃음을 책임지는 가정의 평화 지킴이라고 할 수 있다. S 본부의 달리는 프로그램이, 또는 T방송국의 인터뷰 퀴즈쇼가, '놀지 말라'라고 잔소리하는 M 본부의 새 방송이 ‘도전’하는 프로그램을 대신했지만, 여전히 유재석 님은 나를 웃게 하고 우리 가족을 행복하게 한다.


이번 주말엔 ‘도전’하는 프로그램의 후속작인 ‘놀지 말라’고 잔소리하는 프로그램이 시골학교 콩트를 방송했다. 어쩌면 신선할 것이 하나도 없을 것 같은 포맷에, 심지어 세 명의 연기자가 과거의 캐릭터를 연상시키는 분들이었음에도, 이역만리 타국에서 유재석과 무리들 콩트를 보자 저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그래, 바로 이거지.’


타지 생활은 외롭다. 만날 수 있는 아는 사람이 극단적으로 줄어든다. 특히 해외에서 주부로 살면, 나만 만나는 사람이 거의 없다. 마트에서, 피트니스 센터에서, 복도에서, 우편함 앞에서 이웃들을 만나도, ‘Hi’니 ‘How’s it going’ 정도의 대화만 오고 간다. 아내와 아이는 각자의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조잘조잘 이야기한다. 아이의 새로운 학교 생활도 재밌어 보이고, 아내의 교수님, 동기들 이야기도 흥미롭다. 즐겁게 듣지만, 나만 멈추어 있는 듯한 느낌에 살짝 움츠러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도 집에 오면 하루 종일 써 재낀 영어의 압박에서 해방됨을 느낀다. 아이는 한국에서조차 영어로 수다 떠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하교하는 시간엔 다른 사람들이 있어도 한국말만 쓴다. 나보다 훨씬 영어를 잘하고 익숙한 아내는 영어가 꼴도 보기 싫다며 휴대폰 언어를 한국어로 바꿔 버렸다.


같이 앉아 ‘달리는’ 방송을 볼 땐, ‘놀지 말라’는 방송의 콩트를 볼 땐, 너도 나도 해외 생활 해방의 시간이다. 모처럼 유재석 님 식의 콩트가 주말을 웃음 짓게 해 주었다.

이전 01화 한국 아파트 관리비가 그립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