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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해일 Nov 29. 2023

소설을 쓰지 않을 결심

신춘문예가 끝났다

아마도. 이 글은 브런치 내에서 소설 쓰기에 관한 마지막 글이 될 것이다.


단편 소설 1편. 분량은 원고지 70매에서 80매.

집에서 사용하는 프린트기가 고장 났다. 근처 무인 프린트점을 찾아가서 인쇄를 한다. 표지를 제외하고 A4 10장. 준비한 서류봉투에 넣고 '신춘문예 단편부문'을 붉은 글씨로 쓴다. 이메일 접수를 받는 공모전이 점점 느는 와중에도 꿋꿋하게 우편 접수를 받고 있다니.

우체국에 갔다. 대기 인원 10명. 무거운 택배 상자를 들고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 우편봉투를 가방에 숨기고 있는 나. 20분을 조금 넘게 기다리자 바로 보낼 수 있었다. 일반 등기로 보내주세요. 원래는 고치고 고치다가 마감일 소인을 아슬하게 붙이곤 했는데. 이번에는 마감까지 일주일이나 남았다. 소설을 들여다보면 고칠 부분이 더 보일 테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 당분간. 나는 소설을 투고하지 않을 것이다.


소설을 쓰지 않으려는 게 정확한 의미다. 문예창작과에 진학하겠다고 결심한 열일곱. 무수히 백일장을 낙방하고 대학교에서 주최한 문학상을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실기용 꽁트를 쓰고, 대학교에 붙고, 적응하지 못하고, 노력하지 않고, 전공을 바꾸고, 그러는 동안에도 늘. 소설을 써야겠다. 소설을 써내고야 말겠다. 그런 생각이 지대했다. 그런데 이제야. 나는 소설을 쓰는 감각이 고장 나있는 것을 느낀다. 


나는 소설 쓰기를 사랑하기 위해 애썼다. 그래서 열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 자연스러운 애정이 묻어나는 사람들을 보고 질투했고. 합격. 등단이라는 목적이 명확하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 보여주기만을 고려한 글이 써와서 그랬다고 생각했다. 한동안 열심히 읽던 문학상 수상집 읽기를 중단. 문학 이외에도 영화, 만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음악, 예능 등등 여러 장르를 섭렵. 쓰고 싶은 것을 막 쓰기. 쓰고 싶지 않을 때 쓰지 않기. 그동안 소설 수업을 듣기도 하고 듣지 않기도 했다. 대부분 합평 수업. 내 글을 읽어주는 것도. 다른 사람의 글을 읽는 내내. 나는 찜찜함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인정해버리고 말았다. 순수하게 소설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소설 쓰기가 그리 재밌지 않다는 것을.


산문 입시를 준비할 때, 그런 얘기를 들었다. 


시는 타고난 애들이 쓸 수 있는 거에 비해 소설에는 재능이 중요하지 않아. 시 영재는 들어봐도 소설 영재, 들어본 적 없잖아.


한 달 남짓 다닌 학원이었다. 그저 글을 쓰고 싶단 소망 하나로 찾아갔던. 이제 당시 선생님의 이름과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데 이 말은 계속 떠다닌다. 


대학 적응 실패. 문우? 합평? 스승? 그런 것 없이 혼자 골몰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나는 이런 사고방식에서 빠져나오질 못했다. 노력과 성실성만 갖춰지면 해결될 거라 생각했다. 오래 퇴고를 하다 보면 글을 객관적으로 보기 어려워진다. 재미를 모르겠고. 어느 시점. 털어버릴 때는 더 이상 읽지 못하겠어서. 가까운 누군가에게 글을 보여주고, 나름의 반응을 얻는 것도 좋지만. 쓰레기를 만들었다는 자괴감이 든다.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욕망이 너무 커서. 소설이라는 틀에 짜 맞추긴 했지만. 이 작업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서사 자체에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더군다나 등장하는 캐릭터 모두, 파편화된 나. 자아분열하는 나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런 글은 세상에 널렸다.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글을 쓰기 시작하는 사람들. 남녀노소 막론하고 엄청 많다. 적당한 키워드를 검색해서 방문한 블로그에서 내가 쓴 것 같은 문장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내가 취해있는 이 감성이 나만이 가진 반짝이는 그 무엇이 아니라는 것.


다시 처음의 마음을 떠올려보면. 글을 쓰겠다고 말했을 때 회의적인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그걸로 밥 벌어먹고 살 수 있겠어? 네가? 그런 소리에 반감이 올랐고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눈에 보이는 성과. 나는 성공에 목을 매달고 있었다. 늘 열망하는 것에 비해 행동은 미미했지만.


막연히 부풀기만 하던 이상이 언젠가부터 그려지지 않는다. 일정 온도를 넘어버려 방치 중. 새까맣게 타고 있다.


이젠 내가 생각하는 성취를 모르겠다.


투고 이후 나는 소설을 쓰지 않았다. 일기는 항상 쓰고 있고. 설명하지 않는. 곡해하는 공백이 아주 많은 글을 쓰기도 한다. 읽고 싶은 책을 읽는다. 자기 계발, 비문학, 인문, 시, 그래픽노블 등등. 글로서 무얼 해야겠다는 생각이 희미해진다. 그런데. 그런 비생산적인 시간이 꽤 괜찮은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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