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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llara Mar 14. 2024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진 날

'맛있다고 해주지'

볶음밥


남편은 특히 볶음밥을 잘 만든다. 식은 밥뿐만 아니라 갓 지은 따끈따끈한 밥을 이용한 그이의 볶음밥은 컴퓨터 앞에서 불려 나온 아내와 큰딸이 연신 엄지를 쳐들게 만드는 맛이다.


남편은 버터 사용을 즐긴다. 돈가스나 오징어 튀김 등 기름을 넣어 튀기거나 볶는 음식을 좋아하는데 큰딸 때문에 즐겨 먹기 어려운 탓인지도.


그이는 버터를 먼저 녹이고 간 마늘과 깍두기를 잘 볶은 뒤 밥과 섞어 낼 뿐인데 맛이 여간 고소하다. 딸도 아내도 남편의 깍두기볶음밥을 좋아한다.


그가 처음 만든 깍두기 볶음밥을 맛본 후부터 아내는 시어진 깍두기도 버리지 않고 김치냉장고에 저장해 둔다. 남편이 깍두기비빔밥을 만드는데 도움이 되도록.


점심에 맛있는 순댓국을 만들어준 날에 남편의 늦은 오후 단잠을 깨지 않도록 저녁식사메뉴로 큰딸과 함께 조용히 깍두기 볶음밥과 맑은 된장국을 시도했다. 큰딸은 따끈한 밥을 새로 짓고, 시어진 깍두기를 아주 작은 큐브형태로 잘라놓았다. 그리고 적어도 이 집에서 '음식의 달인'  대접을 받는 아내가 프라이팬을 꺼내고 저녁식사 준비를 했다.


남편과 달리 아내는 버터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올리브유에 어슷 썬 마늘과 양파를 볶은 후 깍두기를 넣어 볶은 뒤, 밥을 넣어 함께 섞으며 더 볶는다. 참기름과 으깬 참깨를 살짝 끼얹어주는 것은 덤이다. 그리고 오이나 상추 등을 접시 한편에 곁들여 시각적으로 맛을 올려줄 텐데 냉장실 서랍에 초록 야채가 없다.ㅠㅠ


열심히 만들었는데 점심을 맛있게 먹은 탓인지 볶음밥이 기대에 못 미친다. 좀 당황해서 큰딸에게 맛보기를 청했다.


*먹는 중에  생각나서 사진 찍기



"어때?"


"엄마...  좀 심심한가?"


나도 딸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러게... 점심을 너무 맛있게 먹어서 그럴지도."


'그래도 나야 나! 내가 모처럼 만들었는데...'




조미료


어째 깍두기볶음밥이 좀 밍밍하다. 남편의 볶음밥과 비교하며, 생각이 여러 방향으로 뻗친다.


'버터를 안 넣어서 그런가?

그이는 조미료를  뿌렸나?'


뭘 가미해서 이 맛을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을지 막연하다. 40여 년을 내 스타일로 부엌을 세팅해 왔음에도 내 음식맛은 들쭉날쭉한다. 맛이 뛰어나서 직접 만들고도 신이 날 때가 있고, 그저 그럴 때도 있고. 음식 만들기를 전문가로부터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도로 내 스타일'로 돌아왔다. 그나마 남편 따라다니며 해외에서  많이 맛보고 다양한 세팅을 보고 배운  덕분에 음식만들기를 덜 부담스러워하고, 보다 산뜻하게 접시를 꾸며 세팅할 수 있을 뿐.


결혼 후 맛본 시어머님의 김치찌개는 참 맛있었다. 다 끓인 후 신 김치국물을 한 스푼 더해서 맛을 내셨다. 시어머님은 된장국에도 맛있게 익은 김치국물을 한 스푼 넣으셨다.


첫 번째 해외살이 후 5년 만에 귀국하여 어머님이 거주하시는 아파트 맞은편 동에 살게 되었다. 이후 서울에 거주하는 4년 동안 어머님은 거의 매주 다양한 찌개를 한 냄비씩 만들어 오셨다.


그중 김치찌개는 최고였다. 시어머님의 김치찌개는 어쩌면 그렇게 일관되게 맛있었을까?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님이 끓은 찌게 위에 조미료 1 스푼을 넣으시는 것을 처음 보고 내 눈이 동그래졌다. 그때 어머님은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나는 조미료를 안 넣으면 맛이 없어야."


남편은 집에서도 밖에서도 조미료가 들어가 산뜻한 음식 맛에 익숙해져 있다. 친정엄마는 조미료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당시 유명 탤런트(개인적으로 최고로 좋아하는 분)가 오래 광고한 상표의 조미료 봉투를 찬장에서 본 적은 있지만.


어쨌든 나는 조미료를 설령 넣는다 해도 그때 시어머님 김치찌개의 뛰어난 맛을 재현할 자신은 없다. 그러나 시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나는 다 끓인 된장국에 새콤한 김칫국물을 한 스푼 넣기 시작했다. 어머님이 끓여주시던 국의 맛을 기억하며.


'그런데 설마 볶음밥에 조미료?'


얼마 전 이 남자는 찌개에 조미료를  넣었었다. 맛이 들큼해서 물으니 실토한다.  자신이 만든 찌개가 그저 짜기만 해서 고민이었다고. 그런데 유튜브의 전문 요리사들이 '맛집 음식 같은 맛을 내려면 조미료를 조금 넣으면 된다'라고 했다는 거다. 음식 만들기 역사가 짧아서 맛을 잘 내기는 어려우니 김치찌개 만들 때 조미료를 조금 넣어봤다고 했다. 심지어 그러면 우리가 더 잘 먹었다는 ㅠ


"그러면 나랑 사는 동안 조미료를 안 넣어서 맛이 없었어요?"


"아니이, 나는 당신만큼 찌게맛을 못 내지, 역사가 짧잖아.

그래서 얼마 전부터 김치찌개 만들 때만 조미료 도움을 받은 거지."


"자기 찌개는 늘 맛있었는데... 얼마나 넣어요?"


"조금"


"찻스푼 1개?"


"아니이, 오늘은 작은 수저로 한 번."


"우엑, 그러니 이런 맛이 난 거네.


작은 냄비 찌개에 조미료를 사용하고 싶을 땐 문자 그대로 티스푼의 절반쯤만 넣으면 감칠맛이 나요.

아주 조금.  참기름 넣듯 테이블스푼으로 넣으면 맛이 오히려 이상해져."


이미 멸치나 까나리 액젓 등에 조미료가 가미되어 있으니 김치를 담그면 조미료 맛이 날 수밖에 없지만, 아내는 따로 조미료를 사용한 적은 없다. 이제 보니 남편은 조미료 팩을 찬장 한편에 슬쩍 놓아두었다. 사탕수수에서 뽑은 재료로 만든 거라니 나쁘진 않겠지만 그동안 따로 구입해서 사용할 생각을 못했었다. 요즘은 주부들이 치킨이나 비프스톡(닭고기나 소고기 맛이 나게 만든 작은 큐브 모양의 조미료) 등으로 맛을 내기도 하니 조미료를 이용한 맛 내기도 유용하다 싶었다.



수리야, 아빠 모셔와


부엌 앞에 놓아둔 메트 위에서 예쁜 자세로 기다리고 있던 반려견 '수리'가 아빠를 모시러 갔다. 우리 집에 온 지 6년째인 9살의 '수리'는 식탁에 식사준비가 되면 신이 난다.   




"수리야,

아빠 모셔와!"


수리는 큰누나의 명이 떨어지면 즉시 트롯트롯 궁둥이를 흔들며 고개를 들고 행진하듯 아빠나 엄마를 부르러 간다. 문 앞까지 와서 '멍! 멍! 멍!' 으면 우리 가족은


"아빠/엄마, 밥! 밥! 밥!"


으로 해석한다.


이때만큼은 자신이 부르러 간 주인 앞에 서서 가슴을 쭉 펴고 으기양양하게 돌아온다. 임무를 마친 뒤엔 큰 누나가 준비한 수리만을 위한 저녁식사 접시가 기다리고 있으므로.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진 날


"볶음밥 어때요?"


남편은 싱겁거나 짜거나 스스로 조절할 뿐, 한 번도 '맛없다'는 표현을 한 적이 없다. 결혼 30년이 지나서야 신혼 초 겨울에 들통에 끓인 콩나물을 사흘동안 연속 먹으면서 당황했다는 기억을 고백했었다. 음식 만들기가 머리 무거워서 한 번 만들어서 계속 먹게 만든 새댁 시절이다.

(그림 출처: https://ko.ac-illust.com/clip-art/)

나는 식탁 앞에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다.


"맛이 어때요?"


" 별로인데."


"헐, 잠이 덜 깬 거 아뇨?"


"아니 맛이 그다지..."


"잘 생각해 봐요. 볶음밥이 볶음밥이지 뭐."


"오늘저녁 볶음밥은 보통임. 내 것이 더 맛있음"



난데없이 솔직한 남편은 다 먹고 웃음을 띠며 일어선다. 남편의 메뉴 평에 큰딸은 덧붙인다.


"에고, 맛있다고 해주지. 아빠는~"


얼씨구, 큰딸은 더 가관이다.



"오늘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진 듯, 하하.

엄마가 피곤했나 보다."


남편이 으쓱거려서 나도 덧붙였다.

어쨌든 남편의 음식 만들기는 지속적으로 격려가 필요하므로

일단 '아빠의 볶음밥이 맛있다'는 주욱 일관성 있게.


"당신 볶음밥은 환상인데..  

막상 자기와 같은 맛을 내기가 어렵더라고.

볶는 순서가 있어요?"


자다 깬 형편에도 남편은 속으로 뿌듯한가 보다.


"별 순서 아닌데..."


나도 핑계를 댄다.


"아니이, 오늘  점심 순댓국이 너무 맛있어서 생긴 부작용인 듯.

어떻게 혀 맛 돌기가 두 끼니 연속 환상의 맛을 느끼겠어?"


내 혀끝의 미각도 남편의 볶음밥보다 못함을 느낀 터이지만 맛이 없지는 않은데...  두 사람의 맛 평가에 섭섭한 아내는 설거지는 안 하기로 했다.


"뒷처리는 그대들이 하시오."



 그래도 그렇지.  늘 내편이던 큰딸이 순간 내민


"맛있다고 해주지~"


는 또 뭔가?

                                                                                    


에필로그


젊어서부터 농담이라곤 모르는 <버럭 범수> 별명의 남편이 농담을 하는 시간이 오다니. 정반대 성격의 여자와 남자가 오랜 적응 기간 동안 부딪치면서 서로의 가슴에 쌓인 사리알 덕분일 거예요. 가족 구성원인 아빠와 엄마, 여동생에게 늘 양보만 해온 큰 딸이 모처럼 센스 있는 속내를 내보이는 모습에 새삼 감격한 아내는 오늘도 소소한 일상에 감사합니다. 방문해주신 여러분 덕분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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