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덧을 하던 젊은 시절에도 음식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일이 없었는데, 이 나이에 음식이 눈앞에서...
두 아이를 가졌을 때도 남편에게 "이 음식을, 그과일을..."같은 얘기를 한 기억이 없다. 난데없이 한겨울에 딸기가 먹고 싶다고도 할 수 없었다. 요즘에야 다양한 재배 방식과 수입선 다변화로 과일이 제철을 가리지 않고 상시 진열되어 있지만, 1980년대 당시는 제철 과일 외엔 불가능했다.
며칠 전 쿠팡 쇼핑검색 중 팝업창으로 갑자기 나타난 냉동순대가 밤에 누었는데도 자꾸떠오른다. 내가 순대를 좋아했던가 헷갈릴 만큼 신경이 쓰이게. 아마도 찌부듯하게 끝난 가족들의 외식이던 불량 순댓국 맛이 마음에 걸려있었을지도.하는 수없이 일어나서 그 제품평을 확인했다.
*암모나이트 모양의 냉동순대(사진 출처: Coupang)
미루고 미루다가
사진을 보고 주문했는데도 막상 받아본 냉동순대는 생소하다. 순대는 학창 시절 생물교과서에서 본 암모나이트 모양으로 진공포장되어 있다. 최선의 포장방법일 텐데 시각적으로는 좀 비호감이다. 통째 냉장실에 넣어두고 차일피일 미루었다.
열흘이 지나니 냉장실에서 혹여 변질될까 마음이 쓰인다. 어느 하루 세끼 중 간단한 아침, 점심, 가벼운 저녁 중 '언제? 어떤? 스타일'로 준비하는 게 좋을지 생각하며.
순대는 스팀이 '뿜뿜' 뿜어져 나오는 솥에서 꺼내어 비용에 맞춰서 어슷어슷 잘라 간과 함께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내어 주는 것을 남편이 이발 다녀오는 길에 가끔 사 왔다.하여 현관입구서재에서 큰딸과 아내의 귀는 현관 중문이 조용히 밀리는 소리가 나면 쫑긋거린다. 반려견 '수리' 촉과 거의 동시에.
'이번엔 뭘까?'
남편이 수년째 장보기를 전담하고 있다. 이 남자의 군것질 습관 덕분에 두 여자는 아기오리들처럼 군것질거리를 다양하게 맛보는 중이다. 각종떡, 과자, 초콜릿, 약과 그리고 뻥튀기, 아이스크 등.
남편은 닭발이나 돼지껍질 같은 메뉴는 선택해 본 적이 없다. 아내는 이들이 드라마속 포장마차에서 소주와 함께 등장하는 장면을 보며 가끔 어떤 느낌일까 궁금할 때도 있다.
하지만 남편은 단호하게 '거절'이다. 친정식구들도 친구들도 술을 즐기지 않으니 이들 메뉴를 먹자는 사람이 없었다. 순댓국도 그럴 뻔했다.
순댓국밥은 딸 아프기 전에 다행히 오피스텔 입주자 대표회의 후 그 지역 토박이인 회장님이 맛집이라며 안내했다고 한다. 덕분에 남편은 맛있는 순댓국집을 개발한 듯 내 순댓국 경험을 만들어주었다.
'신촌'과 헷갈린다는 이유로 '잠실새내역'으로 이름이 바뀐옛 '신천역' 먹자골목 끝의순댓국식당은 마치 서초동 고속터미널이 재건축되기 전 산재했던 주변 역전 식당들처럼 여간 허름했다. 그곳에서 오래 살았어도 돌아다니질 않으니 근처 가볼 만한 식당을 알지 못한다. 누군가를 만나는 장소로는 찾아오기 쉽게잠실이나 삼성역의 백화점 식당으로 안내했었다. 특히 그곳 냉면과 스파게티는 비싸지 않으면서 맛이 깔끔했다.
남편을 따라가면서도 속으로는
'끓이면 이미 어슷하게 잘린 순대 당면이 국속에서 풀어질게 뻔한데... 지저분한 모양이 되지 않을까?' 했다.기대 없이 어릿하게 앉아 순댓국을 기다렸다.
수수한 외양인데, 들깨가루와 싱싱한 부추곁들이에 양념장이 함께 내어진, 돌솥에 담긴 순댓국은 손님들이 여기저기서
'소주 한 병이요'
를 외치게 만드는 맛이었다. 주변 건축현장작업자들이 퇴근길에 작업복과 장화차림으로 어울려서 순댓국과 소주로 고단함을 다독이는 모습도 보였었다. 우린 ' 소주'대신 '사이다'를 주문했다.
그 후 오피스텔에서 업무를 끝내고 나올 때 남편과 두세 번 들렀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묘한 끌림이 있던 식당이다. 그리고 어느 날 식당이 문을 닫았다. 그 후 딱히 순댓국 먹을 기회가 없다가 귀하게 돌아온 건데, 겉이 그럴듯한 순댓국 체인점 식당에서 처음 맛본 산패순대의 씁쓸함을 경험한 셈이다..
둘 다 순대를 아주 좋아하진 않는다. 더구나 순대요리는 해본 적이 없으니 남편의 부엌출입을 격려해 준 만능요리사업가인 백종원 사장님의 레시피에 의지할까 생각했다.
남편도 나도 전 세계의 한인 요린이를 만들어낸 백 선생님 팬이다. 하여 옆지기는 핸드폰을 켜두고 백 선생님이 보여주는 대로 잡채와 순두부찌개, 김치찌개 등을 금세 만든다, 약간의 재료만으로도. 옆지기는 근래엔 몇몇 유명 요리사가 운영하는 유튜브도 함께 보는 듯하다.
옆지기는 부엌 입문 40여 년 역사를 가진 아내보다 요즘 손이 더 빠르다. 그이는 백 선생님 덕분에 돼지감자탕도 시도했었다. 논문 쓰기가 시작되면서 늦게 귀가하는 두 여자를 위해 자주 점심과 저녁 도시락을 후식과 함께 싸주느라 부엌을 자주 드낙거리다가 갈수록 발전을 거듭했다.
젊은시절에 3년이나 요리를 배운 나는 최근엔 부엌을 듬성듬성 들어갔더니 손맛은 멈추고, 레시피 노트들만 책장에 누렇게 꽂혀있다. 후퇴 중인 나와 달리 드디어 남편 음식에서는 시어머님 손맛이 나기 시작한다.
'순대는 자기가 레시피 보고 할래요?'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입속으로 삼켰다. 그리고 냉장실의 진공포장 순대를 더 이상 방치하면 안 될 것 같아 하는 수 없이 꺼내어 꼭 낀 비닐포장을 벗겼다. '포장째 조리'라고 쓰여있지만, 집에서조차 비닐째 고온의 스팀을 사용하는 일은 환자와 함께 사는 내가 편치 않다. 다소 겉이 손상되더라도 비닐을 벗겨서 하기로.
냄비에 스팀판을 얹고 삼베 밑받침 천을 깔았다. 끝부분이 비닐에 끌려가며 순대껍질이 조금 벗겨졌다. 속살인 붉은 당면이 드러났지만 그대로 스팀으로 쪘다. 포장되었던 상태일 땐 걱정스럽던 순대의 외모가 스팀을 맞은 후에 탱글탱글하게 살아난 감촉이 꽤 괜찮다.
보드랍고 따뜻한 순대를 예쁘게 잘라서 접시에 놓았다. 그리고 양파와 부추, 고수를 섞은 야채샐러드에 블루베리를 얹어 내놓으니 보기에 좋다. 비트를 넣은 핑크색 물김치를 각자 접시 옆에 곁들였다. 간이나 내장 등의 부산물은 없지만 따뜻한 찰순대 맛이 좋다. 얼음을 띄운 비트 물김치의 깔끔함도 순대 맛을 더 좋게 만들었다. 용량이 많았는지 절반이 넘게 스팀통에 남아있다.
'저걸 어쩐다? 절반만 찔걸...'
'연달아 순대를 먹기는 좀..."
궁리가 많았다. 일단 절반이나 남은 순대를 식힌 후 긴 사각 반찬통에 담아 냉장실에 다시 넣었다. 이틀 후에나 '빨간 떡볶이 옆의 순대'라든가를 시도해 봐야겠다. 딸에겐 궁중떡볶이를 해주고, 우린 거기에 고추장을 넣어 맵게 만들어보기다.
여우가 판 함정에 빠져주는 곰
이틀 후 남편이 차린 가벼운 아침식사 후 아내는부엌을 정리하며 바뀐 속내를 슬쩍 흘렸다.
"순대가 남았는데... 신선도가 떨어질까 걱정돼서... 순댓국을 집에서 만들 수 있을까? 너무 복잡하겠죠?"
오, 남편은 즉시 아내가 판 함정에 빠져주었다.
"요새 레시피가 얼마나 잘 나오는데.
먹고 싶어?
내가 점심에 해볼게."
"우와, 집에서 순댓국? 복잡할 텐데..."
60이 훌쩍 넘어 이제 여우가 된 아내가 말끝을 슬쩍 흐리는데 곰 남편은 가볍게 끌려온다.
"아냐. 어렵지 않을 거야."
잠시 후 그이는 마트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제노아빠, 간단하게, 진짜 간단하게요."
막상 재료를 사 오겠다 하니 요리사 레시피대로 제대로 사 올까 봐 두근두근하다. 이런 모순이라니 ㅠㅠ.
그이가 제대로 재료를 준비해서 만들어주면 잘 먹으면서도 여우는 반쪽의 고마움을 잊고 이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