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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llara Mar 07. 2024

당신 덕분입니다

어머님 손맛을 닮아가는 남자

그 남자의 순댓국


 남자는 금세 마트에 들러 사골국 2인분, 부추 1단을 사 왔다. 그리고 건다시마, 말린 양파껍질, 파뿌리, 파의 파란 줄기, 말린 버섯, 멸치가루 등으로 육수부터 만들었다. 그 여자는  들깻가루, 고춧가루, 양파, 마늘, 생강, 청양고추, 고수를 준비해 줬다.


                                                                                                                  

*출처 Coupang(사진을 찾으니 여러 브랜드에서 사골곰탕 상품을 생산중이군요. 다른 상품은 복사방지여서 오뚜기 제품만 올립니다)


사실 아픈  24시간 동행으로 체력이 달려 장 보기를 수년 동안 포기한 그여자는 사골국을 대기업에서 소분 포장음식으로 만들어 판매하는 것도 몰랐었다. 신장과 심장기능이 시원치않은 딸에게 배달음식은 엄두도 못 내고, 봄과 가을에 사골을 사서 우려주곤 했었다. 1인 가구를 위한 가공식품 사골국이라니 좀 생소하다.


얼마 후, 구글스칼라(Google  Scholar)에서 찾아낸 동물매개교감치유(Animal -Assisted Therapy, AAT)와 읽기 도우미견 프로그램(Animal-Assisted Reading, AAR) 관련  최신 자료를 몇 페이지 읽었을 뿐인데, 부엌 쪽에서부터 순댓국 냄새가 솔솔 퍼지고 있었다.


이때쯤이면  두 여자의 식탁세팅 보조가 필요하다. 큰딸은 수저세트를 배치하고 얼음녹차를 준비해서 각자의 컵에 따라 식탁 위에 놓았다.  여자는  반찬을 세팅했다.


*비트, 사과, 무가 어울린 물김치


와, 그 남자가 처음으로 만든 순댓국은 최고였다. 무엇보다도 재료가 신선하고 정갈했다. 요리를 배우지 않은 남자가 레시피만 보고도 순댓국을 끓여낼 수 있다니.


남편이 정성껏 손질해서 놓아둔 신선한 부추와 오이장아찌 그리고 핑크빛의 비트물김치를 함께 먹으니 참 좋다. 두 손이 건강하니 이렇게 만들어 먹을 수 있어 감사하다. 아차, 다 먹고 나서야 사진 찍기가 생각났다. 고소하고 따끈한 그 남자의 순댓국에 빠져서 그만...


 그 남자는 천상 손 맛 좋으신 어머님의 아들이다. 음식을 잘 만들지 못해도 입맛은 정확한 큰딸도 '엄지 척'이다.  그이는 식품회사들의 사골국 낱개 판매 덕분에 '맛을 내기에 편해졌다'라고 했다. 새삼 국내 거주의 편리함에 감격한다. 해외에서 한정된 표현의 영어로 낯선 문화 속에서 소통하느라 긴장했던 젊은 시절의 고단함이 떠올랐다.



당신 덕분에


"다음 생엔 여자로 태어나세요.

어떻게 습도  없이 이런 맛을 낼 수 있대요?"  


"당신이 신선한 들깨가루랑 준비해 줘서 가능했지."


그 여자와 그 남자는 모처럼 "당신 덕분이오"를 주고받는다. 돌아보니 이 평화를 위해 오랜 시간 자갈돌처럼 부딪치며 깎여서 꽤 둥글어졌나 보다.


젊은 시절 성격이 급했던 그 남자 그 여자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50대 초반에 세 번째 해외생활을 중도 마치고 사표와 함께 귀국했다. 그리고 그 남자는 그 여자 같은 주소에서 머무는 동안 예기치 않게 점점 전의를 상실해갔다.


계절이 다른 나라에서 서로 손님처럼 휴가 내어 번갈아  6개월마다 1~2주씩 방문하는 동안 한 사람의 주거지가 배우자에게는 휴가지가 되었다. 방문객인 배우자를 손님처럼 최대로 배려하여 여행, 영화, 쇼핑, 맛집으로 이어지던 시간에서 함께 같은 공간 살이로의 현실적인 변화는 적응기간이 필요하다.


욕실 사용습관을 비롯하여 조금씩 다르게 고착된 생활스타일은 남편도 아내도 피차 부자연스러워 포용하는 데에 시간이 걸렸다. 그러는 동안 씩씩한 남자이던 남편은 아내의 주공간인 방4개의 집에서  안방은 아내와 공유했다. 두 딸이 각각 방을 1개씩 사용하고 서재는 공동 공간이다.


하여  자신 명의의 집에서 갑자기 자신만의 공간이 없음을 인식하고 어색하게 머물면서 그 남자는  '조용한 우울'을 겪었다, 거의 모든 공간에 아내 소지품이 놓여있는 집에서. 그리고 아내가 줄여가는 공간에 남편의 소지품이 놓이기 시작했다.


겨우 적응하고 다시 일을 시작하여 평화를 품을 무렵 큰딸의 아주 작은 암수술이 있었다. 그리고 평생 처음 겪는 응급병동 행이 시작되었다. 6개월 후에는 앞일을 예측하기 어려워 먼 날에 대한 목표를 내려놓았다. 가벼운 암수술이라 했는데 정작 수술 후 퇴원 다음날부터 의식을 잃고 쓰러져 피를 흘리고 다치고, 전해질 불균형과 칼슘조절장애가 왔다. 신장을 상하고 경련이 수반되는 등 갈수록 태산을 이루는 예측불가의 병증으로 성인인 큰딸의 보호자로 그 여자가 졸지에 묶였다.


"강제노 보호자분!"


응급실로 실려가고, 입원하고, 진단을 위한 여러 검사가 이어지고, 응급병동에 누워있는 동안 계속되던, 그여자의 귀에 쟁쟁한 부름이다.


조금씩 마음의 톤이 낮아진게 환자의 보호자가 된 부부가 같은 목표를 갖게 되면서부터인가? 인생은 오르고 내리고의 연속인가 보다.


문득 서로의 뒷모습이 짠해 보이는 나이가 되니 "덕분이오"가 자주 나온다. 마음속에 순간 품었던 핀잔이나 지적이 입 밖으로 나올 때는 처음 의도와 달리 질문이나 칭찬 으로 순화되어 나온다. 덕분에 듣는 이도 잘 수용하고, 자주 배우자로부터 격려를 받아 힘이 난다. 60이 넘은 어른도 칭찬엔 주저 없이 여우꼬리가 들썩거린다.  


오늘은 확실히 반찬 솜씨 좋으셨던 시어머님 덕분이다. 어머님 반찬을 먹고 자란 아들이 어머님 스타일로 솜씨 발휘를 했다. 이미 하늘에 계시니 두 손을 잡고 감사를 표할 수는 없지만.


"어머님, 당신 덕분입니다."

진작에 알았어야 했는데...


*맛있다고 했더니 사흘 후에 또 만든 두 번째 순댓국ㅠㅠ. 덕분에 사진을.



깍두기볶음밥은 우리가 할까 


그 남자는 점심에 시도한 첫 순대국에 엄지 척을 두 개나 받은 탓에 기분이 '하하하'였다. 그리고 저녁 깍두기볶음밥까지 책임지겠다고 했다. 얼씨구,  여자는 오늘 저녁도 오이 무침 등 밑반찬과 우거지국만 준비하는 걸로.


하늘에서 내리는 흰눈을 맞으며 찬바람을 쐬고 시장을 다녀와서 땀을 흘리며 순댓국을 만들었던 그 남자는 저녁준비가 시작될 오후 5시 즈음에는 책을 손에 든 채 1인용 의자에 앉은 자세로 잠들어 있다.


"엄마, 오늘 깍두기 볶음밥은 우리가 할까?"


그래, 네가 재료를 준비하면, 볶는 건 엄마가 같이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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