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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llara Apr 18. 2024

감정을 지닌 척추동물의 5대 자유

어린 시절에 만난 가축들



어렸을 때 본 국내 가축들에 대한 기억은 사람들이 때(?)가 되어 잡아먹을지라도 집에서 키우는 동안은 자신의 가축에 대한 정성이 지극했던 것으로 남아있다.  물론 1970년대부터 서구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동물권'과는 조금 다르지만 적어도 1960~70년대는 국내에 밀집사육이 보급되기 전이었다.


내가 사는 마을에서는 겨우 몇몇 가구에서 밭이나 논을 가는 쟁기를 끌 소를 키웠으니, 자급자족 의미로 가축 키우기 정도였다. 사람들은 소, 돼지, 닭, 오리, 거위 그리고 집을 지키는 개 등의 먹이와 식수 그리고 쉼터 제공에 진심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내 할머니집의 닭들 중 암탉이 알에서 무사히 깨어난 병아리들을 품에 거느리고 다녔던 모습도 눈에 선하다. 행여 뒤뚱거리는 아기병아리들이 다칠까 봐 날개를 펼치고 걷는 예민한 암탉을 배려해 주라는 할머니의 말씀이 미리 있었다. 암탉과 병아리들이 마당에서 노니는 동안에는  인기척에 라 허둥대는 암탉의 발에 어린 병아리가 밟히지 않게 우리는 극도로 조심하며 마당 가장자리로 조심해서 걸었다.


수탉은 동이 채 트지 않은 새벽에 목울음을 터서 우리들의 선잠을 깨우곤 했다. 할머니방에서 자던 나와 남동생은 덕분에 어둑한 새벽에 눈을 뜨고 머리맡에 자리한 뚜껑이 있는 요강을 이용하고 다시 따뜻한 이불속으로 파고들었다. 너른 마당의 닭집 반대켠에 있는 어스름하게 밝혀진 등불의 변소(오늘날의 화장실에 해당하지만)를 가야 한다면 우린 틀림없이 애써 참다가 결국 이불 오줌을 싸고 말았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판자 밑이 휑하게 터져서 바람이 지나가던 변소가 마당 한편에 위치하던 그 시절에  한밤중 요강 사용은 참 요긴했다.


변소보다는 화장실을 사용한 연한이 훨씬 긴데도 불구하고 아주 가끔 꿈속에서 밑이 터진 변소 사용 중 난감하고 두려운 느낌을 만나곤 했었다. 아침에 깨고 나면 복잡했던 그 감정이 너무도 생생해서 꿈해몽을 찾아보고 싶게 황당했다. 돌아보면 수술 후 예상치 못하게 큰딸의 응급실행이 잦아질 무렵, 그리고 30대의 미혼 딸이 갑상선전절제 수술로 인한 만성신부전과 자율신경계질환 진단을 받고 황당했을 때, 전해질조절장애로 이어지면서 의료소송을 앞두고 고민하던 시점 등이었다. 어린 시절 가축과 함께 한 삶과 50년 후의 삶이 섞인 꿈이라니.


당감나무가 크게 늘어져 있고 그 밑으로 채송화, 코스모스, 봉숭아 같은 작은 꽃들이 담벼락 아래로 길게 이어져 있던 너른 마당은 아침마다 할아버지에 이어서 아버지가 출근 전에 싸리비로 곱게 낙엽을 쓸어내셨다. 쓸어진 마당은 흙위로 아주 가지런한 빗자루 결이 파도처럼 살아있었다. 첫 발자국을 내기가 송구할 만큼 예쁜 빗자루결이었다. 그리고 마당 한편에 곡식 항아리들이 놓인 곳간이 자리하고, 그 곳간 바로 옆에 아버지 키보다 높은 지붕의 작은 집에 닭들이 살았다.



                                                 (출처: 위키백과)


걸쳐진 횃대 2개에는 날렵하게 날아오른 성계들이 두 발로 움켜쥐고 나란히 앉아 있었다. 심지어 그곳에 앉은 채로 졸고 있기도 했다. 날지 못하는 병아리들은 바닥의 짚 위에 자리를 잡았다. 저녁때쯤 들어가 보면 지푸라기로 지어진 알 낳는 둥지에는  늘 달걀이 서너 개씩 놓여 있었다. 또한 닭이 알을 낳기 위해 달걀들을 품고 꼼짝 않고 있던 모습은 어린아이 눈에도 참 경이로웠다. 새끼의 안위를 위한 모성은 교육을 받지 않은 동물도 타고난 성질인가 보다.


할머니는 닭의 모이를 주고 물을 갈아주러 닭장에 들어가시면서도 닭에게 말을 거셨다.


"에고, 물을 다 마셨네. 목이 말랐구나"


"달걀이 따끈하네. 금방 낳았구나. 고맙다. "


등등. 그땐 할머니의 혼잣말을 들으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닭하고 말을 하시네?'


할머니집의 닭은 마음을 먹으면 낮은 지붕 정도는 사뿐히 날아올랐다. 그곳에 서서 목을 길게 빼고, 있는 힘껏 목청을 빼는 닭은 어린아이의 눈에도 정말 멋지게 느껴졌다.  닭은 유난히 겁이 많아서 조금만 가까이 가도 금세 날개를 펴서 제법 멀리 날았다. 특히 횃대로 퍼드득 날아올라 작고 또렷한 눈알을 굴리며 침입자를 지켜보는 모습에서 그들의 긴장상태를 느낄 수 있었다.


작년에 동물복지수업을 준비하면서 소나 닭 등이 놀라지 않게 그들의 집에 들어갈 것을 강조하는 국내 동물복지법 조항발견하고 문득 할머니의 말씀이 떠올랐다.


"달걀을 꺼내러 들어갈 때 닭들이 놀라지 않게 조용조용 걸어야 한다."


걸핏하면 달려 다니는 개구쟁이 손주들에게 닭장에 들어갈 때 '닭들을 놀라게 하지 말 것'을 신신당부하셨었다. 아주 가끔 뒷산의 짐승이 한밤중에 닭장을 습격해서 잠을 자던 닭을 물고 달아난 일이 있었다. 이른 아침 마당에서 닭의 사체가 발견될 때도 있었다. 아마도 개에게 들켜서 도망가느라 산짐승은 닭을 입에 물고 도망가다가 떨어뜨렸을게다. 그런 날 오후에는 밤새 놀랐을 닭을 안쓰러워하며 아버지는 닭장 출입문의 안전을 도모하는 등  더 단단히 단속하곤 했다.




집에서 초등학교 5학년때까지 함께 지내던 하얀 털의 진돗개 <백스>는 수컷으로 무척 명민해서 동네 어른들은 서로 자신들의 개와 결혼시키고 싶어 했다. 개는 요즘 반려견과 달리 마당에 놓인 목재 개집이나 마루 밑에서 살았다. 마루에는 오르지 않았다. 고양이는 실내에서 거주했으나 개는 마당에서 살도록 했었다.


<백스>는 집에서는 앞마당과 뒤뜰을 자유로이 돌아다녔다. 가끔은 뒤뜰 옆에 위치한 밭의 새들을 쫓기도 하고, 자주 뒤뜰의 사립문 틈으로 나가 건너마을까지 가서 친구들과 어울리다 돌아왔다.


기족들 중 아무도 <백스>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설령 마당에 개가 보이지 않아도 날이 어둑해질 때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중성화수술이 없던 때이다. 할아버지가 군청에 출근하실 때는 버스를 타고 떠나신 할아버지를 쫓아가서 군청 입구 문옆에서 종일 기다렸다가 퇴근하시면 또 뒤쫓아오곤 해서 할아버지가 출근 시에 <백스>를 감나무에 끈으로 묶어두고 출근하셨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왼쪽 사진: 세계명견 334호 천연기념물 53호 지정 진돗개 (출처: 광주일보 2023-05-30 http://m.kwangju.co.kr/)

*오른쪽 사진: 6가지(누렁이, 흰둥이, 검둥이, 칡개, 재구, 네눈박이)로 구분되는 진돗개 털색 중 흰둥이 백구 진돗개(출처: 나무위키)


진돗개의 특성대로 내 어린 동생까지도 주인가족이라고 잘 따르던 <백스>는 정작 이웃이나 우편배달부 등 타인들은 허락 없이 우리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주인이 마중 나가면 그때서야 얼굴의 근육 경계를 풀고 꼬리를 쳤다. 집을 잘 지키던 백스는 10살 되던 해에 문간에 마련된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위한 아침상을 올리던, 황토로 만들어진 상방에서 쥐약을 먹은 쥐를 입에 물고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쥐를 잡아먹은 적이 없는 백스가 왜 쥐를 입에 물었는지는 미스터리였다.


그때 아버지와 어머니의 슬픔은 말할 수 없이 컸다. 나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외지의 근무지에서 달려오셨을 때를 빼고는 아버지의 눈물이 글썽이는 슬픈 눈처음 보았다. 그리고 각자의 근무처에 계시던 아버지도 어머니도 혼자가 되신 할머니 곁으로 돌아오셨다. 그렇게 나의 즐거운 시골생활이 시작된 셈이다.


백스는 유난히 무서움을 타는 도시처녀였던 어머니의 시골 결혼생활에 의지가 되었다고 했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어머니가 퇴근 후 제사 준비로 부엌 바닥에 앉아 지푸라기에 재를 묻혀 맨손으로 놋그릇을 닦아 반짝반짝 윤을 내었다. 그동안 백스는 어머니 곁에 머물며 어머니의 어둠에 대한 무서움을 날려주었다.  겨우 20대 후반이었던 어머니는 이미 진돗개 백스와의 소통을 통해서 동물매개치료에서 말하는 <인간과 동물의 상호 유대관계 Human-Animal Bond>를 유지하고 계신 셈이다.



돼지와 소


할머니는 제법 큰 공간에 사는 닭과 오리들, 거위, 개에게 먹이를 제때 주고, 식수는 물그릇에 잘 채워주곤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부엌 앞에 마련된 돼지우리에는 늘 뜨물을 부어주면 돼지는 꿀꿀대며 목을 축였다. 돼지 분뇨 냄새가 났지만 돼지가 밥을 먹는 모습은 언제나 볼만했다. 어찌나 맛있게 열심히 먹는지 돼지 밥 먹는 모습은 볼 때마다 감탄스러웠다. 식사라야 우리들의 밥상에서 먹고 남은 찌꺼기들과 돼지전용으로 끓여만든 사료 풀인데  무에 그리 맛있었을까?



                     (출처: 동아일보 2020-11-16 https://bizn.donga.com/)


"너희 둘 또 거기에 앉아있냐?"


돼지우리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 식사 중인 돼지 입을 열심히 바라보던 우리 남매는 할머니가 부르시는 소리를 듣고서야 일어섰다. 그리고 오십 세가 되어 부모님, 작은아버지내외분을 비롯하여 우리 형제들과 태국으로 가족여행을 가서 숫자를 구별해 내는 훈련을 받은 돼지들의 묘기를 보았다. 그리고 십 년 뒤 대학원에서  돼지 지능이 여태 가졌던 내 선입견과 달리 꽤 높고, 청결한 환경 좋아한다고 배웠다.


내 어린시절 우리 마을에는 아예 축사를 지어두고 소를 여러 마리 키우는 집도 있었다. 친구네는 소를 1마리 키웠다.  논밭의 흙을 갈아엎을 때 무겁게 등에 맨 쟁기를 끌며 일을 하는 소였다. 아마도 장날엔 그 소가 5일장이 서는 지역까지 주인과 장날에 나가는 무거운 물건을 달구지에 싣고 갔을지도 모르겠다.


초등학교 시절 하교 후 친구가 자신보다 10배는 몸집이 커 보이는 소를 데리고 우리집 뒷산으로 올라가면, 나도 가끔 동행했다. 친구네 소의 눈빛은 순했지만, 이따금 배나 옆구리에 붙어있는 파리들을 쫒는 세찬 꼬리나 뒷발을 조심해야 한다고 친구가 여러 번 강조했다. 덕분에 나는 소의 뒷발이 닿지 않게 멀찌감치 떨어져서 따라갔다.


       

                       *밭갈이  (출처: 오마이뉴스 2012-04-20)


친구는 누렁소를 소나무에 메어두고, 나무그늘 아래 앉아서 나와 함께 책을 읽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흙을 퍼 나르는 개미도, 풀벌레도, 송충이도 정말 싫은데, 그때는 친구와 나란히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가끔 친구는 소를 위한 풀을 뜯으러 깔망을 메고 혼자 산에 오르기도 했다. 겨우 초등학생 여아였는데 들일에 바쁜 가족들 대신 소의 먹이를 구해오는 일을 친구가 도왔다. 국민교육헌장을 초등학생까지 외우게 하던 때도 친구는 소여물죽을 끓였다. 나는 친구네 아궁이 앞에서 함께 앉았다. 그리고 불을 때고 있는 친구와 누가 더 빠르게 "국민교육헌장"외우는지 시합을 했다.


                     (출처: 연합뉴스 2010-10-01)


'동네에서 결혼식이 있거나, 누군가가 하늘 같은 고시를 패스해서 영감님 호칭을 취득했을 때, 아들의 유명대학 입학을 축하하기 위해 등등'의 목적으로  기르던 돼지나 소를 잡아 동네잔치를 한다는 소식이 가끔 들렸다. 어제까지 눈을 맞추고, 잘 먹으라며 뜨물을 물그릇에 담아주고 애정했던 돼지나 소를 그렇게 소비하면 어린 나는 한동안 마음이 '싸아'해서 육식을 멀리했었다. 할머니 집의 닭도 한여름 우리들의 점심으로 닭죽이 되어 올라왔다.


그리고 내 나이 육십을 앞두고 투병 중인 환자가 되어 좌절하는 서른둘 나이의 큰딸과 보호자의 심리치유를 위해 함께 <동물응용과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덕분에 호주 출신으로 미국 Princeton University 철학자인 Peter Singer의 <Animal Liberation>을 원본과 번역본을 함께 구입해 읽었다. 그리고 처 생각지 못했던 과거의 일들이 들쭉거리기 시작했다.




감정을 지닌 척추동물의 5대 자유


적어도 내 어린 시절에 본 자급자족 형태의 가축들은 오늘날 대량공급과 대량수요에 맞춘 닭의 케이지 배터리사육이나 임신돈의 스톨 사육, 부드러운 송아지 고기 공급목적으로 송아지가 움직이기 어렵게 짜인 사육틀 사육, 칸칸에 묶여 매일 우유를 착즙 당하는 젖소들의 생활과는 거리가 먼 자유로운 공간거주자였다.


적어도 닭은 모래목욕이나 횃대에 날아오르는 행위 등의 본능적인 행동을 할 수 있으며, 넓은 앞마당과 뒷마당을 돌아다니고 채마밭의 씨앗들을 부리로 뒤지고 다녔다. 돼지는 돼지우리 내의 진흙을 코등으로 문지르며 진흙에 뒹구는 행동을 할 수 있었고, 소도 훨씬 넓은 공간에서 앉고 서고 누울 수 있었으며, 마음껏 신선한 풀을 뜯어먹을 수 있었다. 오늘날 전염병으로 감염여부에 관계없이 한꺼번에 산 채로 땅구덩이에 매몰되는 형벌은 없던 시대의 가축 들이다.


1960~70년대에 어린 내가 만난 가축들은 1993년에 영국농장동물복지위원회 FAWC가 제시한 동물의 5대 자유이며 2023년 4월부터 전면개정 실시된 한국동물보호법에서 제시한 동물의 5대 자유이기도 한 다음의 5가지 자유를 이미 누리고 있었나 보다. 적어도 불필요한 고통인 닭의 부리제거나, 수평아리로 태어나자마자 분쇄기에 넣어지거나, 수퇘지의 냄새제거를 위한 거세 등은 없었던 시절이므로.  앞에서도 소개했지만, 다시 한번 생명유지의 기본을 음미하기다.



(척추)동물의 5대 자유


1) 배고픔과 갈증으로부터의 자유

    (Freedom from Hunger and Thirst)

2) 불안으로부터의 자유

    (Freedom from discomfort)

3) 고통, 상처로부터의 자유

    (Freedom from Pain, Injury, Disease)

4) 정상적인 행동 표현의 자유

    (Freedom to Express Normal Behavior)

5) 공포와 스트레스로부터의 자유

    (Freedom from Fear and dist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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