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들의 오케스트라
2025년 손주 하원을 맡은 날엔 나도 하원 후 손주 친구들과 함께 유아원 바로 앞의 놀이터로 간다. 이곳에서 4살부터 6살까지의 어린아이들은 폭신한 바닥의 놀이터를 냅다 달려 다닌다. 모래가 아니니 다칠 염려는 적다.
아이들은 놀이터에 도착한 순간 그저 강아지처럼 몇 바퀴를 달린 다음에야 각자의 보호자들에게 와서 물을 청한다. 보호자들은 작은 군것질거리와 물을 주며 땀을 닦아주느라 바쁘다. 아이들은 행복하게 놀이터에서 1시간 넘게 놀고서야 '집으로 가자'는 보호자의 제안에 동의한다.
아이울음이 귀한 2025년 한국에서 어린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보는 어른도 덩달아 행복해진다.
그나마 일터가 많은 서울이니 젊은이들이 몰려서 그들의 자녀인 어린아이들을 이 정도라도 볼 수 있다는 뉴스이다. 그저 건강하게 달려 다니는 아이들이 귀하고 예쁘다. 또, 맞벌이 가구가 많은 현실에서 직장인으로 또는 전업으로 아이를 낳고 키우는 젊은 부모들이 대단하고 고맙다.
1990년 백호주의가 강하다는 나라의 대도시에서 3세 5세였던 두 딸에게 아파트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허리 손!>을 말해서 발레걸음으로 발을 떼게 했었다. 우리 아이들이 그 아파트에서 유일한 어린아이들이고, 고등학생을 둔 가구가 2 가구 있었다. 대부분의 가구가 자녀들이 독립하여 부부 또는 동거인 그리고 노인 단독 가구였다.
아래층 나 홀로 어르신의 예민함에 걸리지 않기 위해 여간 마음을 썼다. 바로 집 앞 노인복지센터 1층에 유아원이 있었다. 마침 그 옆 공간에서 주 1회 인도 발레리나 쌤의 '어린이 발레스쿨'이 저렴한 가격으로 개원했다.
발을 떼면서부터 비둘기처럼 걷던 두 딸은 발레스쿨을 다니며 두 다리를 부채처럼 펴서 걸었다. 1년 후 중고생들의 탭댄스 걷기를 시연하여 그 나이 때의 달려 다니는 본능을 조절할 수 있었다.
시드니의 아파트는 카펫이 바닥 전체에 깔려있다. 연세 드신 어르신들이 아파트에 혼자 거주하는 경우가 많아 소음에 다소 예민했다. 파란 눈빛으로 눈을 똑바로 보며 소통하는 방식에 익숙하지 않던 우리 가족은 지레 움츠러들었다.
"엄마, 아래층 할머니 무서워. 내 눈을 계속 계속 들여다봐."
그 당시에는 아시안이 많지 않아 본의 아니게 귀한 아시안이 되어서 원주민의 눈치를 많이 보았었다. 처음 인사 나누는 자리에서도
"어디서 왔느냐?"
"언제 네 나라로 돌아갈 거냐?"
는 질문을 받곤 해서 나는 '4년 거주 예정'이라고 답했다.
보수적인 호주 원어민들은 외국인 특히 아시안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던 시기이다. 3년이 될지 5년이 될지 남편이 소속된 회사 사정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왜 아직 안 가냐?"는 질문을 받을까 봐 꽤나 소심해졌었다.
처음 시드니에 살게 되었을 때에는 홍콩 반환으로 인한 중국인이 밀려오기 전이어서 아시아인을 길거리에서 보는 일이 흔하지 않은 시절이었다. 걸어 다니는 아시안 외교관이 된 두 아이는 글자를 깨우치기 전부터 도서관에서 그림책 읽기에 익숙해졌다. 어린 시절부터 집에선 <정숙>그 자체로 움직이며 소음을 이웃에 주지 않도록 강조한 까닭이다.
다행히 인형 머리 빗기와 옷 입히기, 찰흙 놀이, 종이접기, 색칠하기 등과 만화영화 시청으로 무료함이 채워졌다. 아래층 할머니가 유럽 여행 중 받았다는 에코백 2개를 내 아이들에게 선물했다. 나는 그녀에게 비스킷 선물 꾸러미를 전달했다. 그렇게 할머니와 거리가 가까워졌다
1990년 초 그곳에서는 넓은 놀이터에 노는 아이들도 거의 없어서 우리가 머쓱하게 독차지했다. 주거지가 거의 단독주택이고, 인구밀도도 1제곱킬로미터당 한국은 450명인데 반해 호주는 약 2.1명이었다.
1990년 기준 한국 인구는 약 4,300만 명인데 반해 호주는 약 1,700만 명이었고 2020년 기준 한국은 5,180만 명, 호주는 2,570만 명에 달한다(출처: https://www.google.com/search).
인구밀도가 낮은 도시에서 함께 노는 아이들이 없으니 두 아이도 금세 흥미를 잃고 그네 몇 번 밀어주면 미끄럼틀 두어 번 미끄러진 뒤 돌아오곤 했었다. 이미 출산율이 감소하여 인구감소가 시작된 곳이었건만 그곳에서 한국인인 나는 1980년대 후반부터 급격히 줄어든 한국 출산율에 대한 관심도 낮고 정보도 어두웠다.
두 아이는 하교 시간에 일터에서 돌아온 보호자의 차를 타고 손을 흔들며 떠나는 아이들이 사는 외국 도시에서 하교 후 놀이터 친구는 꿈도 꾸지 못하고 4년을 보냈다. 마음 여린 두 딸에게 엄했던 엄마노릇을 사과하고 싶다.
*1973년/1983년 대한가족계획협회 포스터(출처: 연합뉴스 2023. 08.26)
2살 반 4살 반의 두 아이를 데리고 시드니에 도착했던 당시에는 한국의 '둘만 낳아 잘 기르자'와 이웃 중국의 '하나 낳기'로 여전히 아들선호가 강한 사회에서 지구의 넘치는 인구 줄이기가 옳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나만 낳아 기르는 가정이 앞서가는 신세대로 보였던 시절이다.
그때 자연 늦둥이로 둘째 아들을 낳은 친구에게 그 친구와 아주 친한 지인은 자신처럼 하나만 키우다 '산아제한'에 실패했다며 "야만인"이라고 놀렸다. 우린 지구 인구가 45억을 넘어 최대의 노력으로 인구감소를 실행하여 지구오염을 줄이는 일이 절체절명의 과제라는 교육을 받은 세대였다.
지구 전체 인구 증가가 2024년 기준 65억 명이 되어 45억 명이던 시절의 50%가 늘어났다. 반대로 한국의 2024년 출생률은 0.7명 이하로 줄어들었다. 심지어 0.67명을 기록했다는 기사도 있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2023. 12. 02
"IS South Korea Disappearing?"
제하의 기사에서
한국의 합계 출산율 0.7명은 14세기 흑사병 창궐로 인구가 급감했던 중세유럽의 인구감소를 능가한다는 칼럼을 실었다. 즉 200명이 다음 세대에 70명으로 줄어든다는 의미임을 강조하며 극단적으로 낮아진 한국 출산율은 인구붕괴 수준이라고 우려를 표시했다.
1989년의 우리는 2023년에 한국의 인구소멸 문제를 미국의 뉴욕타임스에서 언급할 만큼 심각한 인구감소의 미래가 오리라는 상상은 감히 하지 못했었다.
현재 우리 아파트 단지 바로 옆에 유치원이 있다. 유치원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는 마당 작은 놀이시설에 매달릴 때나 더운 여름 옥상 위의 수영장이 개장되는 날이면 더욱 크게 들린다.
우리 가족은 뒷 베란다 유리창을 열어젖히고 아이들이 놀며 떠드는 소리를 듣는다. 어린아이들이 놀이시설 위를 걸으며 놀거나, 물소리를 내며 유치원 옥상 수영장에서 떠드는 소리는 어떤 오케스트라보다도 멋진 연주이다. 어린아이들의 소리는 생명의 소리가 되어 우리 가족을 생기 있게 만든다.
오른쪽으로는 초등학교가 있다. 봄과 가을에 스피커를 동원해서 아파트가 쩌렁쩌렁 울리게 운동회를 한다. 아침 일찍부터 운동장은 흙바람을 펼치며 아이들의 즐거운 놀이터가 된다.
예전처럼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모여 구경하는 운동회는 아니지만, 보호자들도 더러 모여있다. 예전보다 훨씬 깔끔하게 관리되어 스텐으로 된 가방걸이도 운동장 양쪽에 놓여있다.
이 학교도 인구소멸로 서울 도심의 학교처럼 폐쇄될까 겁난다. 아이울음은 거의 안 들리지만 어린아이들이 도우미보호자와 더러 아파트에 드낙거리는 중이니 학교가 유지되는 희망은 있어 보인다.
위층에 세 아들을 키우는 이웃이 있다. 몇 년 전 처음 이사오던 날 우리 집 천장에서 쿵쿵 소리가 종일 요란했다. 시간 대중도 없는 소음에 한 달을 견디다가 인사 차 올라갔다.
초인종을 누르니 현관문이 열렸다. 중문 안으로 어린 아기가 기어서 나왔다. 10개월이라고 했다. 중문에 서 있는 두 아이는 두 돌과 5살이라고 소개받았다. 큰 딸이 한참 병원을 다니던 시기로 병원 검사나 입원 아니면 침대에 누워 잠만 자던 시절이었다. 천정 위에서 달려 다니는 소리는 수면제로 못 들은 척하기가 어려운 수준이었다.
아이들의 연령이 대화로 해결될 상황이 아닌 게 당황스러웠다.
"아이고 아들 셋인데... 1층이면 아이들이 편할 텐데,,,"
아래층 사는 게 갑도 아닌데 나는 가벼웠다.
쓸데없는 소리를 건네고 나는 미안해하는 아이엄마에게 속 마음과 달리 손사래를 치며 머쓱하게 내려왔다.
얼마 후 큰 아이가 막 퇴원해서 휴식이 필요한 날이었다. 당시에는 시장에 소개된 지 얼마 안 되어 친정부모님이 스테비아토마토를 여러 박스 보내주셨다. 다소 생소한 스테비아토마토 상자 2개를 선물로 들고 올라갔다.
"미안해, 누나가 오늘 아파서 조금만 뛰어줘. 내일부터는 뛰어도 돼. 누나가 많이 아플 때만 부탁할 게"
"네, 조심할게요."
다섯 살 남자아이가 귀엽게 대답했다.
아이엄마는 소음방지를 위해 거실 바닥에 유치원 패드를 깔았다고 했다. 아이들은 거실뿐만 아니라 우리가 주로 컴퓨터 작업을 하는 안방과 입구방 천장 위에서도 달려 다녔다.
다음에 우연히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큰 남자아이가 말했다.
"토마토, 정말 맛있었어요. 처음 먹어봤어요, 고맙습니다."
나도 처음 맛본 스테비아 토마토는 한없이 먹을 만큼 생소하고 맛있었다. 덕분에 나는 세 아이들과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아이들의 건강한 호르몬은 세 아들들이 자정 이후에도 뛰어다니게 했다. 그래도 몇 년 지나면 학교로 유치원으로 갈 테니 그때는 뛰라고 빌어도 안 뛸 거라고 우린 위안을 삼았다.
실제로도 아이들이 천정 위에서 대각선으로 뛰어다니는 소리들이 크게 불편하진 않았다. 세 아이들과 얼굴을 익힌 사이이니
'셋 중 누구일까'
맞추기 시합을 큰딸과 하면서 웃었다.
남편은
"아이들이 건강한 징표야, 감사하지!" 했다.
우린 졸지에 할머니 할아버지 코스프레를 하게 되었다.
세 아들을 키우는 엄마가 큰소리 한번 안 낸다. 아이들의 엄마는 참 곱다. 마음이 고운 윗집 주민과 전화번호를 나눠가졌다. 그녀는 아이들이 좀 많이 뛴 날 마음에 걸려서 녹차케이크 상자를 우리 집 현관 문고리에 걸어두고 내게 핸드폰메시지를 보냈다. 나는 한 달쯤 후 답례를 했다.
길거리에서 그녀 혼자 지나가며 인사하면 마치 변장한 것처럼 나는 매번 못 알아본다. 아이들과 함께인 그녀만 기억되기 때문이다. 혹시 내게 안면인식장애가 생겼는지도... 진심 낯설다.
어느 날 아이 할아버지가 아이네 집을 방문하셨나 보다. 엘리베이터에서
"고맙습니다. 아이들이 너무 뛰어서 죄송합니다."
하셨다.
"저도 손주가 있습니다."라고 인사를 드렸다.
아들 셋의 윗집과 첫인사를 나누고 10개월 후쯤 내 손주가 태어났었다. 그 댁 막내보다 1살 늦은 아이를 키우는 작은 딸은 침대와 가구를 제외한 집안의 빈 공간에 두꺼운 매트를 꼼꼼하게 깔았다. 우리 집 방문 시 윗집 아이들의 뛰는 소리를 들었던 까닭이다.
"엄마, 괜찮아요? 매트를 안 깔았나? 심한데.."
"남자아이만 셋이야!"
맞벌이 딸 내외가 첫 아이의 분리불안으로 인한 눈 깜박임 증세를 보며 고민할 때 자신의 경력을 내려놓고 세 아들을 건강하게 잘 키우는 그녀에게 가끔 연령별 성장과 부모 노릇을 묻고 싶곤 했다. 놀이치료와 아빠와 함께 하는 산행, 요리 함께 하기 등을 시도하며 지혜롭게 극복해 낸 작은 딸 내외가 보호자이니 외할머닌 물러서서 기다렸지만 그 당시 마음속에선 그랬다.
시간이 참 빠르다. 덕분에 나는 당시 나이에 대여섯 살을 더했다. 처음 만났을 때 기어서 인사를 나오던 윗집 막내는 유치원에 다닌다. 작년까지 가끔 현관에서 울음을 터뜨리며 엄마에게 떼를 썼다. 감기에 걸려서 병원 가는 길이라고 했었다. 젊은 엄마가 진땀 나게 어린아이가 떼를 쓰고 우는 모습까지도 이웃 눈엔 웃음이 방그레 나오게 귀엽다. 당최 아이울음이 안 들리는 아파트라서 더욱 그렇다.
문득 돌아보니 올해는 한 번도 아이들 소리를 못 들었다. 엘리베이터에서 인사를 나눈 윗집 큰 아이는 이제 초등학교 4학년이라 했다. 의젓하기 그지없다. 쓰레기 재활용이 있는 일요일엔 윗집의 어린 두 아들이 종이상자와 플라스틱 병들이 들어있는 바구니를 들고 나와 부모의 일손을 거든다.
빠른 세월 속에서 윗집 아이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 아이들이 이웃이어서 참 행복하다. 세 아이들의 건강하게 떠드는 소리가 문득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