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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참 나빴다.

마음에 쌓인 재가 날아서

by 윤혜경

"조문체계도버튼생활법령버튼"


통계청과 동물복지법 관련 기관들에서 동물복지 관련 자료를 찾으면서 필요한 조항들을 복사해서 한글 메모붙였다. 새로 생긴 국가고시인 <동물보건사>가 되기를 원하거나. <반려동물 관련학과> 전공자들이 국가자격시험에 대비해서 익혀둬야 하는 중요한 법규와 실천해야 할 내용들이다. 물론 우리 생활과 밀접하니 일반인에게 도움 되는 내용도 있다.


지식에 있어서 새로움은 늘 신선하게 느껴진다. 자료를 읽다가 자료에 붙어 따라온 '복사방지 문구'를 반복해서 보게 되면서 그예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덕분에 흐린 기운도 입 밖으로 터져 나온 웃음과 함께 날아갔다.


"조문체계도버튼생활법령버튼"


<사운드오브 뮤직>의 배우 줄리 앤드루스가 마법사로 분한 영화 <메리 포핀스>에서 우산을 펴고 사뿐히 날아 내려오던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가? "조문체계~"가 내겐 노래하는 음표처럼 살아 움직이며 유모 줄리앤드루스의 즐거운 주문처럼 경쾌하게 들렸다. 마치 내게 날아오르는 까만 장우산을 펴주는 듯한 느낌으로..


<복제방지용 주문>이 이토록 경쾌한 리듬으로 전달되다니~^^



사실 국내외 자료들을 비교분석하는 중에 연 2주를 대학 병원을 들락거리느라 의욕이 바닥에 기어 다녔었다. 불편한 검사들을 받고 돌아와 눕는 일이 반복되어 이제 원고 마감시간 염려가 스멀거리던 차였다.


마음이 급하니 좀 예민해져서 가족들이라야 큰딸과 옆지기인데 그예 **세상에 고맙고 소중한 내 사랑들**에게 불친절해졌다.


어찌 된 일인지 우리 집에서는 컴퓨터가 나보다 먼저 피곤을 호소하곤 한다. 연식은 5년쯤 되었는데 자꾸 느려지며 컴퓨터가 발을 질질 끈다. 양보차 휴식을 제공하기 위해 일단 껐다.


같은 연식인 복합기는 잉크 세트를 겨우 두 세트째 사용인데 가루가 묻어 나오고 이중으로 프린트되어 점잖은 서류나 논문복사는 동네 인쇄소에 의뢰해 왔다. 서비스 기사님 진단을 받고 녀석의 심장을 거의 새 제품 절반 값을 지불하고 교체했다. 겨우 5년에 심장이 나가다니 내 가슴이 벌렁거릴 지경이다.

컴퓨터에게 머릴 식히라고 잠깐 휴식을 준 덕분에 가족을 위해 나는 더운 날 점심식사를 준비했다. 시원한 얼음을 띄운 콩물국수를 해주려 검은콩부터 잘 씻었다. 물이 넘치는 번거로움을 방지하고자 터무니없이 큰 사골국 냄비 바닥에 담고 가스불을 켰다. 큰딸에게

"열심히 끓으면 찬물을 두어 컵 부어줘."

하고 말했다.


자료를 찾으며 원고를 쓰는 중에 옆지기가 부엌에서 큰소리로 부른다.

"부침가루가 여기 있었는데..."


'이 더위에 부침가루를 밖에 방치하면 어떡하냐?'는 대거리는 내 마음속에 눌러 담았다.

밀가루나 곡류를 밖에 방치하면 여름더위에 크고 작은 나방들이 금세 난다.


죄다 냉장고나 김치냉장고에 넣어두니 내 옆의 남자는 마땅치 않아 한다. 딱 필요할 때 밀가루도 부침가루도 냉장고 속에 숨어서 안 보이니 숨이 턱 막히나 보다.


"내가 찾아줄게요."

바로 일어나서 김치냉장고 첫 번째 칸에서 꺼내 주었다.

출처: 쿠팡

이 남자는 950L의 6 도어 냉장고의 큰 문 두 짝을 모두 대문처럼 열고 서있다.

'아이고'이다.

바로 눈앞의 물건을 못 찾아 냉기를 밖으로 내보내서 냉장실을 기가 막히게 하는 남자가 부엌을 자주 거의 담당하고 있다.


부엌을 어설프게 담당하니 마음속에선 '어이구'이지만, 내가 당장 아쉬우니 다독이며 동행 중이다.


이만한 조력자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집안일을 1/3씩 나누어하게 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살살 다독여서 참여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고맙게도 그이는 최선을 다해서 부엌과 욕실을 반짝거리게 정리 정돈을 해놓는다. 번거로운 음식물 쓰레기도 휴일의 재활용쓰레기 정리를 위한 택배박스 갈무리도 그이 몫이다.


딸도 눈치껏 손이 필요한 곳에 손길을 내민다. 특히 빨래를 널고 개키는 일, 세탁하기, 설거지와 청소기 돌리는 일을 도맡아준다.


아. 자주 입이 마르는 나를 위해 결명자 차, 옥수수차, 녹차를 예쁜 컵에 담아 마우스옆에 놓아준다. 이미 보온병을 준비해 컴퓨터 앞에 앉지만, 딸의 차 서비스는 주문도 없는데 찾아오는 사랑이어서 더 좋다. 두 사람 덕분에 오늘의 평화가 있다.


그래도 여전히 집안일은 자주 주부의 손이 가게 된다. 가족 구성원의 의식주가 평화롭게 돌아가는 데엔 물속 백조의 가는 다리처럼 크고 작은 일손들이 쉬지 않고 움직여서 맛있고 깔끔하고 깨끗한 하루가 만들어진다. 하여 자주 지치는 마음속 문장과 입 밖 문장이 아슬아슬하게 다르다.


입 밖으로 좋은 문장이 나올 수 있게 필터를 사용하는 것이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이긴 한데, 가끔은 대나무숲에 가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대신 '누구는 왕멍청이'라고 외치고 싶어진다.


부엌 일과에 참여한 지 몇 해째인데 아직도 야채칸에 남은 재료들을 확인도 안 하고 또 구입해서 작은 청양고추 봉투가 3개나 된다. 먼저 샀던 고추들은 물러져있다. 수분이 과하게 맺힌 비닐을 제거하고 고추들은 음식쓰레기로 버렸다.


야채칸을 정리하고 닦는 일은 또 내 일이다. 돋보기를 봐야 신문을 읽는 눈에 매번 이런 것들은 쏙쏙 들어찬다.


어제는 냉장실에서 남은 반찬들을 담아두고 열어보지 않은 채인 작은 반찬통들을 버리고 정리했다.


식탁 위에 커다란 타월 행주들을 펼치고 넓게 건조했다. 행여 그 남자가 마른행주로 물기를 닦아내지 않기를 바라면서.


안에 두부가 있는데 남자는 확인 없이 긴 두부를 또 구매했나 보다. 만들어 둔 살구쨈과 블루베리잼은 안 먹고, 자기가 좋아하는 딸기잼을 따로 구입했다. 냉장고에 쨈 병이 여럿이다. 자꾸 커다란 내 두 눈 레이더에 걸린다. 될수록 안 보려 노력하는데도...


이런 마음속의 지적질이 들통나는 순간 내 평화가 깨지는 건 불 보듯 훤하다. 별명이 버럭범수였던 남자가 여성 호르몬이 나오는 시기가 되니 조금씩 부드러워진다. 이토록 손길을 내밀어 내 시간을 만들어주는데 나는 고마움을 자주 잊는다.


반대로 나는 남성호르몬이 나오는가 보다. 예전과 달리 마음이 불쑥 급하다. 마치 남녀 역할을 바꾸는 중인 것처럼.


원고를 보며 문장을 정리하고 위치를 바꾸며 교정작업 중에 두 번 부엌에 불려 갔다 왔다. 머릿속에 안개가 들어온 듯 뿌해졌다. 막 앉아서 영국 동물복지법 역사를 처음부터 다시 읽고 있는데 옆지기가 컴퓨터 방으로 와서

"콩이 다 탔는데..." 한다.


"재노! 넌 콩 좀 보라니까 이게 뭐냐?"

그예 옆지기 몫까지 꾹꾹 눌러둔 불똥이 애꿎게 착하디 착한 큰딸에게 튀었다.


"끓으면 찬물 두 컵 넣고 지켜보라니까...!"


출처: 위키백과

김치부침을 준비하던 옆지기가 보다 못해 막고 나선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들어가"


"뭘 알아서 해? 내 콩은 놓아두고, 자기 김치부침이나 준비하셔."


속으론 '부엌에 있으면서 바로 옆에서 끓고 있는 콩도 안 봐주냐?' 하는 원망이 담겼다.


에쿠, 붙잡지 못하고 필터링 없이 감정이 날것으로 튀어나갔다.

겁 없이 아뿔싸!!!


"뭘 그렇게 짜증을 내?"

"....."


단번에 잘못을 인지하고 내 목소리가 들어가 버렸다. 부엌에 서면 냉장고나 김치냉장고에 서늘하게 넣어둔 반찬재료인 밀가루, 쌀가루, 육류, 고추장 등을 못 찾아 아내를 불러재끼는 남자에게 쌓인 불만이 적지 않다. 최선(?)을 다하는 중인 이 남자는 쌓인 재는 눈치도 못 채고,

'콩이 좀 탔기로서니 금세 짜증을 내나?'

싶은 가보다.


옆지기는 남자티를 내느라 대뜸 짜증이다.

큰딸에게 미안하다. 큰딸은 놀래서 옆에 바짝 붙어 내 허리를 안는다.


"엄마, 미안해."

"더워!!!"


마음속으론 '넌 늘 언제나 고맙고 예뻐!'인데...

못된 엄마의 갑질에 무안한 딸의 얼굴이 발그레해지는 걸 보고도, 입이 참지 못하고 휴일의 낮을 쨍그랑거리게 만들었다.


다행히 타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 나는 콩을 물로 헹궜다. 손이 빠른 큰딸이 믹서에 검은콩을 두부와 함께 갈아 고소한 콩물을 준비했다. 옆지기는 국수를 아주 잘 삶아서 고소한 콩물국수가 만들어졌다.



'

출처: 나무위키


두 사람이 품어준 덕분에 평화가 다시 돌아왔다.


오늘 콩물국수 사건은 머릿속 일거리 정리에 바쁘고, 수면이 부족한 여러 날의 과로에 마음의 날이 선 '내 탓'이다. 큰 냄비에 한 컵의 콩을 삶으며 물을 적게 부어 끓인 후 물 두 컵을 추가하고 놓아두었으니 당연히 물이 졸아들어 바닥에 눌어붙을 지경이 된 거였다.


동시에 마음을 나눠 쓰지 못하니 두 가지 일을 하면 덜 중요한 일은 건망증 수준으로 놓곤 한다. 동물매개심리치료는 오늘 내가 받아야 할 상황이 되었다.


큰딸이 바깥바람을 그리워하는 말티스 '수리'를 데리고 산책을 다녀왔다. 미안한 마음에 나는 털이 복실거리는 '수리'를 데리고 욕실로 가서 강아지 샴푸로 발바닥을 잘 닦아 헹궈주었다. 드라이어로 '수리 발 말리기'는 큰 딸이 했다. 드라이어의 열기에 딸의 고운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내일 오전 미팅이 있다. 화장하고, 오고 가고 하루 종일 시간을 소요할 테니 이번 주말에 웬만큼 원고 마무리가 되어야 한다. 마음이 무겁다. 이제는 수면시간을 줄이면 생각 집중이 오히려 더 안되어서 아주 비효율적이다. 잠을 충분히 자는 게 훨씬 생산적이다.


영국 초기의 '동물복지'와 '동물의 5대 자유'를 다시 확인하고 보니 작년의 기관 명칭이 금세 바뀌어 있다. 각국 기관들도 국제기관들도 내용들이 보완되고 시대상에 맞춰 변화하면서 기관들 명칭이 바뀌고 로고도 바뀐다. 코로나 시기에 특히 <인간과 동물> 관련 해외 전문 연구 기관들이 홈페이지를 개편하고 로고를, 회사명을 바꾸었었다.


물론 '세계동물복지협회'처럼 새로 바뀐 기관명칭과 로고에 구 기관명칭과 로고를 함께 사용하는 유예기간이 긴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곧바로 확인이 필요하다. 그것만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서, 내겐 갑자기 바뀐 것처럼 보여 빠른 확인이 필요하다. 행여 정보가 다르게 전달되지 않도록.


오늘 만들어진 감정의 널뛰기는 '내 탓이오'이다. 내 옆에 마음결이 고운 큰딸이 있어 늘 고맙다. 콩이 죄 타기 전에 알려주고, 어이없는 아내의 횡포까지 잘 참아준 옆지기도~♡♡


"오늘도 엄마가 미안해~**"


그리고 우린 다시 평화를 맞았다. 함께 나누어 자료를 찾는데 마침 동물복지법을 부분별로 소개하기 위해 몇 군데를 복사해서 붙였다. 정리하려 나중에 보니 '어머머...'


" 당신이 내 자료를 공짜로 복사해 갔으니 조금 고생 좀 하시오~"


를 의미하는 국가 기관의 <복사 경고> 표식이 따라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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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기관이나 단체, 개인들 중 복사를 하려면 아예 못하게 얼음을 만들거나 복사된 자료들의 내용을 뒤섞어서 '복●붙'을 사용하기 어렵게 프로그램을 만들어놓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행논문이나 새로운 신뢰성 있는 정보들을 참고해서 후학들의 글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출처를 당연히 명기하지만 다른 사람의 수고를 가져다 쓰는 일에 그 정도의 수고를 하더라도 쓸 수 있게 해 준 곳은 고맙기 그지없다. 아예 복사 기능을 막아두는 곳이 점점 증가 중이다. 결국 AI의 힘을 빌어 정보를 가져오게 할 수밖에 없다.


시원한 콩물국수를 잘 먹고 원고를 준비하던 중 복사경고 표식 덕분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애교 있는 경고 덕분에 웃으며 자료를 부분 부분 복사해서 내 한글 연습장에 붙여놓고 해외 자료들과 편리하게 비교할 수 있어 시간이 절약된다. 물론 자료를 사용할 때는 출처를 방문일자 포함 제대로 쓰는 게 당연하다.


오늘 하루는 톱니처럼 들쭉날쭉하는 감정들을 잘 품어준 가족 덕분에 평화를 다시 찾아 참 다행이다. 일주일 후에는 서울 소재의 한적한 절에서 미팅이 있으니 마음을 잘 씻어낼 수 있으리라 기대를 해본다.


밖에서 남에게는 "아, 네네네!"면서, 정작 마음을 모두 내주는 ♡사랑 가득한 소중한 가족에겐 쉬이 무례했던 시간을 반성한다.


"여보, 큰딸!

마음 가득 미안 미안해~**"


휴일에 임시돌봄차 작은 딸 집에 간 적이 있다. 작은 딸네 5살 아이는

아이엄마로부터 <정리정돈습관 들이기>를 부탁받은 이모가 평소 치워주던 매너와 달리


"놀고 난 장난감은 정리해야지~"


하자 놀라서 쳐다보았다. 마음을 다스리더니 이모를 거들어 치우면서


"이모, 참 나빴다."


라고 말했다. 어린아이도 자신의 허물에 대한 지적은 불편한가보다.

오늘 이럴 때 손주가 봤으면 고 작은 입술을 달싹거리며

"할머니, 참 나빴다!"

하며 재판을 해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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