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왜 사니?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
얼마 전, 구독하고 있는 뉴스레터가 이메일 창을 똑똑 두드리며 이렇게 물었다.
“넌 왜 살고 있니?”
죽음이 생물학적으로는 어떻게 정의되는지, 철학자들은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죽음을 다루는 문화 콘텐츠는 무엇이 있는지 소개하는 글이었다. 뉴스레터의 말미에, 고슴도치 캐릭터가 고개를 빠끔 내밀고 위의 질문을 독자들에게 던지며 뉴스레터는 끝났다.
당시에는 그 질문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렇게 잊히는 듯했다. 그런데 그 후 그 질문이 불쑥불쑥 생각이 났다. 그런데 그 생각난 이유가, 울림이 있다거나 대답이 뒤늦게 생각났다 거나 해서가 아니었다. 질문 자체가 이상해서였다.
보통 과학에서 ‘왜’라는 단어는 현상의 원인을 파악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낼 때 사용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왜 사냐”는 질문은, “삶의 원인을 규명하시오.”와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삶은 그저 발생하여 유지되는 것이다.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어떻게 발생한 것인지 설명할 수는 있겠지만, 생이 틔워지는 것에 대해서는 대단한 사유가 끼어들 틈이 없다. 사유하기 전에 이미 존재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질문이 이상한 두 번째 이유는, 죽음에 대해 다룬 뉴스레터에서 삶에 대해 질문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뉴스레터가 죽음에 대해 다루는 것이 맞다면, (숨을 잠시 고르고 읽어주시길) ‘넌 왜 안 죽니?’라고 묻는 것이 조금 더 알맞다. 그 문장이 품고 있는 뜻이 통상적으로 극히 부정적인 의미여서 차마 그 단어의 조합을 쓸 수 없었던 것일까?
물론 그 사고의 흐름은 이해가 간다. 뉴스레터를 작성한 사람은 죽음의 반대편 끝 쪽에 삶이 서 있다고 믿은 것이리라. 하지만 정말 그럴까? 삶의 부재는 죽음인 걸까? 죽음의 부재는 또 삶인 걸까? 호흡기를 달고 누워 의식이 없는 사람은 삶이 부재한 것일까, 죽음이 부재한 것일까? 건조한 환경에서 몇 백 년 묵었지만 그 안에 생명을 내포하고 있는 씨앗은, 살아있는 것일까 죽어있는 것일까?
삶과 죽음 자체가 아예 없는 세계도 존재한다. 사실 모든 세계가 그렇다고 거칠게 가정할 수 있다. 수많은 생이 존재하는 지구는 매우 희박한 확률로 나타난 극히 드문 예외사항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좁고 작은 지구에서 매 순간 삶과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는다. 그러나 이 연약한 예외 사항을 지워버릴 수 있을 만큼, 우주의 거의 모든 공간은 삶도 죽음도 없는 공터다. 그 우주에 대고 천문학자들은 제멋대로 ‘별이 탄생한다’ 라거나 ‘별이 죽는다’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삶과 죽음은 모두 호흡을 가진 것들의 전유물이다. 호흡이 없는 별, 가스 덩어리들은 뭉치거나 흩어질 뿐이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라는 시에서 김상용 시인은 왜 사냐는 질문에 대처하는 훌륭한 모범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바로 다음과 같이 하는 것이다.
“왜 사냐건 웃지요.”
물론 이 문장이 ‘그 따위 질문을 하다니, 참 웃기는 질문도 다 있네’라는 냉소를 의도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독자 내키는 대로 해석할 수 있다는 점이 또 문학작품의 매력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