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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에이 산불로 한밤 중에 대피한 날

by 권지혜 Jan 16. 2025

Photo by Tiffany Rose-Getty


2025.01.08 화요일

미국에 산 이래로 내가 겪은 바람 중 가장 심한 강풍이 불었다. 출근길 라디오에서 강풍주의보가 있으니 나무나 시설물들이 훼손되거나 떨어져 다칠 수 있으니 주의를 요한다고 앵커가 당부했다. '오늘 바람이 심하겠구나...' 하며 운전했다. 근무 시간 도중에 바람을 쐬고 싶어 건물 문을 여는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 센 사람이 그 문을 누르고 있었다. 반대 편 문으로는 나갈 수 있긴 했는데, 느낌이 무서웠다. 진짜 주차장에 걸어가다가 나뭇가지 같은 거에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일찍 퇴근을 했다. 그날 밤 내내 휭윙 휘윙하는 바람 소리가 무섭게 나고 형광등이 여러 번 껌벅이고 와이파이도 두 번 정도 끊어졌다가 돌아왔다. '물을 받아놔야 하나? 전기가 끊기려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핸드폰과 랩탑 충전기를 꽂았다.


2025.01.09 수요일 아침

그다음 날 아침부터 말리부 쪽에서 엄청나게 큰 산 불이 진행 중이라는 뉴스를 보았다. 놀랐지만 말리부는 우리 집에서 거리가 좀 있었기 때문에 많이 두렵지는 않았지만 어제 바람을 생각하면 그 피해가 크겠다는 짐작을 했다. 


2025.01.10 수요일 오후

주변의 친구들이 불난 것과 관련해서 서로 걱정을 공유하고 해야 하는 것 하지 말아야 하는 것에 대해이야기들을 했다. 우리는 이 상황을 같이 두려워하고 있었다. 연말에 집으로 초대해 주신 분도 대피 명령이 내려져서 온 가족이 대피를 했다고 하셔서 그때 처음 피부로 와닿았던 것 같다. 우리 집에서 길이 막히지 않으면 고속도로로 20분 거리에 있는 곳. 핸드폰이 산불과 관련된 이런저런 문자들로 하루종일 바빴다.


2025. 01.10. 수요일 저녁

저녁에 근처 사는 친구가 우리 집 괜찮냐며 연락이 왔다. "잉? 우리 집이 왜?" 그래서 검색해 보니 할리우드에 불이 나고 있었다. 뉴스도 났고 사람들이 불이 나고 있는 할리우드 힐 영상을 찍어 X에 올리기도 했다. 불이 나자마자 거의 즉시 대피 명령과 경고 지역이 설정되었다. 첫 대피경고 지역 라인이 우리 집에서 두 블록 근처였다가 30분 뒤에는 불과 한 블록 근처로 다가왔다. 강아지들을 키우는 친구는 지금 짐을 싸고 있다고 했다. 나도 결정을 해야 했다. 오늘 밤에 나는 집에 머무를 것인가 불이 난 곳에서 좀 더 멀어질 것인가. 집에 머무르면 잠을 잘 못 잘 것 같았다. 자는 도 중에 불이 커질 수도 있고 불안해서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았다. 평소와 다르게 아파트 복도에 사람들의 목소리들이 많이 들렸다 다들 떠나고 있는 것 같았다. 옥상에서 불이 보이는지 궁금해서 올라가 봤는데 건물들 때문인지 보이지는 않았는데, 내려오다가 짐을 싸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 겁에 질린 표정의 남자를 보았다. '아 나도 가야 하는구나.' 결론은 나도 대피해야 하는 건데 심난하면서도 귀찮기도 했다. 일단은 어디로 가야 하지? 누구의 집에 내가 머무를 수 있지? 생각하다 최근에 함께 짧게 여행한 친구에게 연락을 했고, 어서 오라고 따뜻하게 나에게 말해주었다.


그래.. 이제 짐을 싸야 되는데.. 이게 하룻밤에 끝날지 며칠이 갈지 몇 주일지 최악의 상황에는 내가 사는 곳이 불타버린다면? 너무나 다른 시나리오들이 있었다. 뭐가 가장 중요하지? 일단 최대한 짐을 다 챙기는 건 너무 하고 싶지 않았다. 내 차에 짐을 꽉꽉 채워서 피난 떠나듯이.. 심난해서 그건 도저히 할 수 없었고. 내일을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하루 이틀 내에 좋아지겠지 라는 마음으로 랩탑, 여권, 비자 서류, 지갑, 옷 조금, 책 한 권, 그리고 냉장고에 붙어있던 가족사진을 몇 개 챙겼다. 내가 가진 대부분의 모든 것들을 다시 구할 수 있는 것들이고 딱히 내가 너무나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은 많지 않았던 거 같다. 금액이 비싼 물건도 딱히 없었는데 그 상황에는 그게 다행(?)이었다. 신발을 신고 나가려는데 거실 벽에 걸려있는 학위가 보였다. 미국에 온 이유, 미국에 와서 힘든 게 취득한 학위,, 무겁고 고급스러운 액자에 넣어져 있는 내 학위. 너무 크고 그걸 빼서 가져가는 것도 너무 귀찮았다. '흠.. 자연재해로 잃어버리면 재발급해주겠지 사람이라면 해줘야지..' 이러고 집을 나섰다. 


아파트 주차장에 차가 몇 대 없었다. 불이 난 할리우드 쪽에서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차들이 길가에 많았다. 친구집에 도착해서 뉴스를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친구의 반가워하는 모습이 좋으면서 고마웠다. 내가 와서 같이 이런 긴급상황들에 대해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좋고 사람이 온 게 좋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요새 일이 많은 친구는 나에게 안방을 내어주고 자신은 일을 하다 자야 한다면서, 거실에서 에어 매트리스를 설치하고 잤다. 


2025.01.11. 목요일 아침

다음 날 아침, 할리우드 언덕에 불은 여전히 있긴 하지만 잡혀가는 상황이라 다행히 대피 명령은 취소가 되어있었다. 감사했고 안도했다. 내 집이 비교적 안전한 곳에 있다는 사실이. 친구집에 자는 동안 야외에 차를 주차해 놓았는데 문을 열자 한 밤중 동안 쌓인 재들이 많이 날렸다. 불이 너무 크게 나서 여기까지 재들이 많이 날아와서 쌓였던 것이다. 집에 돌아왔는데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할 수 없고, 공기청정기는 없고, 그냥 그렇게 있었다 감사하면서도 이 상황이 언제까지 지속된 것인지에 대한 걱정이 들었다. 이제부터는 다시 마스크를 써야 한다. 다시 마스크를 써야 할 줄이야.


2025.01.15 수요일 저녁

약 일주일이 지난 지금 엘에이 불 피해 면적은 여전히 비슷하고, 25명이 넘는 사람들이 불로 목숨을 잃었다. 내 상사를 포함한 센터 동료 중에서도 나같이 대피를 한 사람들이 여러 명 있었다. 같은 학교의 교수는 이번 불로 집을 완전히 잃었다고 한다. 소중한 기억이 담긴 물건들이 엉엉 불에 날아가 버린 것이다. 먹던 약도 챙기지 못해 어렵게 약을 구하고, 집문서 또한 챙기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 것들을 다 정리하고 증명하고 보험회사로부터 보상을 받기까지는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 완전히 타버린 동네들이 다시 재건이 되기까지는 정말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이로 인해 근교 집값은 오르고 엘에이의 월세도 감자기 올랐다고 한다. 아무리 미국이 자본주의 사회라지만 이런 상황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정말 마음을 가진 사람들인 건지. 속상함을 넘어 신기한 느낌이다. 자연재해 상황에서 피해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금전적 이익을 최대 활용하는 사람들. 하... 진짜... 휴머니즘 좀 생각하자고...


엘에이가 장점이 너무 많긴 한 곳이지만 이런 치명적인 단점이 있고 지진이라는 위험도 있고, 엘에이에서 집을 소유한다는 것은 여러 모두 위험부담이 크다는 것들 다시 한번 피부로 느꼈다. 지진 집 보험도 따로고 자연재해로 집을 잃어버리면 그 안의 물건들에 대한 보장도 또 따로이고. 모든 게 돈이고 놓치는 부분들이 있을 것이고 그런 부분들을 보험회사들에서는 적극 활용할 것이다. 나는 엘에이에서 계속 살게 될까 아니면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될까. 세계 어디도 갈 수 있지만, 세계 어디에도 유토피아는 없고, 만약에 이런 큰 일을 겪게 된다면 겪기는 싫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예측할 수 없고 미리 준비하기도 힘든 일이기 때문에. 일주일이 된 불은 여전히 규모가 비슷하고 캘리포니아의 소방인력, 애리조나 네바다 등 다른 주에서 그리고 멕시코와 캐나다에서 까지 날아와 도움을 주고 있다. 정말 너무 힘들게 모든 소방관들이 자연재해와 목숨 걸고 싸우고 있다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서. 엘에이의 장점인 비가 거의 오지 않고 일 년 내내 맑고 건조한 날씨는 지금 현시점에서는 너무 잔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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