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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하영 Mar 15. 2023

소개팅 남이 날 위해 ppt를 만들어왔다.

지금은 남편이 됐다.

나는 사람들과 빠른 시간에 친해지만, 그렇다고 쉽게 마음까지 내어주진 못했다. 신랑과 가까워지는 데는 시간이 조금 더 걸렸던 것 같다.


날 보러 한 시간이 걸려 버스를 타고 온 그가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내 단답 문자를 보고 실망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나도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었다. 아직은 온전히 곁을 내어주기가 어색하고, 낯설어서 그런 거였다. 말을 조금 더 길게 해 버리면 상대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한 긴장이 고스란히 느껴질 거 같아서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사귀고 나서도 문자를 단답으로만 쓰고, 오빠라고 부르지 않는 나 때문에 애가 탔었나 보다. 내가 처음으로 그에게 "오빠"라고 불러준 날 장미꽃을 안기며 세상을 다 가진 웃음을 지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그렇게 기쁨에 벅차서 짓는 표정은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꽃다발을 건네면서도 믿지 못했다. 정 오빠라고 부른 게 맞냐며 한 번만 더 들려줄 수 있냐고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크리스마스 전전날인 12월 23일에 처음 만나 이브를 제외한 모든 연말을 함께 보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이끌려 만나는 장소까지 나왔던 것 같다. 그 시기 우리 집 전화기는 밤마다 뜨겁게 불타올랐다. 제대로 된 연애가 처음인 내가 매일 밤마다 친구에게 이것저것을 물었기 때문이다. 썸을 타고 있는 건 신랑이었는데 전화기가 불탄 이유는 친구들에게 묻기 위해서라니 지금 생각해도 그 순진함에 웃음이 터져 나온다. 그의 앞에서는 잘 보이고만 싶었는데 그 방법을 몰라서였던 것 같다. 그렇다고 직접 물을 용기 또한 없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그의 앞에서는 그만큼 숫기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내가 여간 마음에 들었나 보다. 새해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자정에 내게 고백을 했으니 말이다. 나처럼 느린 사람이 고작 일주일 정도를 만나보고 사람을 사귀다니.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사랑은 있을 수 없는 걸 있게 만들고, 말도 안 되는 걸 되게 만든다. 나도 그와 계속 함께 있고 싶었다. 그와 보내는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를 만큼 재미있었다. 내 생에 그런 남자는 처음이었다.


우리는 그때 여자와 남자로 만났지만 건전함 그 자체였다. 함께 오래도록 있고 싶은데 그럴만한 장소가 쉬이 떠오르질 않아 카페에 앉아있다 헤어지기 아쉬우면 동네를 그렇게 돌았다. 서로의 손을 쥐고 서로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다 보니 돌다 돌다 몇 시간을 돈 적도 있었다. 집에 돌아와 다리가 아플 만큼 말이다. 그때 잠시 생각했던 것 같다. 이게 맞나? 하고. 하지만 그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다리가 부러지는 한이 있어도 걸어야지 생각했다.


그런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졌다. 사귄 지 한 달 정도가 되었을 때 칵테일 바에 함께 간 적이 있다. 그때 그가 내게 자신의 옆자리에 앉아보라고 했다. 매번 반대편에 앉아 서로를 보는 거리가 딱 적당했는데 갑자기 바로 옆자리라니. 그것도 사람이 별로 없는 그 공간에서 그의 옆자리라니. 나는 긴장이 돼서 나무막대처럼 굳어져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별로 가고 싶지 않았다. 엉뚱하게도 사귀고 있으면서도 아직 그만큼 가깝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신랑은 그런 날 어르고 달래 자신의 옆자리로 오게 했다. 시간이 오래 지나 그 방법이 떠오르진 않지만 선뜻 다시 엉덩이를 들고 그의 옆으로 갔던 걸 보아기 다루듯이 잘 다뤘던 것 같다. 나는 그의 옆에 앉아 어깨도 펴지 못했다. 내 심장이 쿵쾅 거리는 소리가 그에게 전달될 것만 같아서 고개를 푹 숙이고 얼굴은 홍당무가 된 채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그가 이상하게 요란스러웠다. 뭔가를 꺼내고 만지고 정작 오라고 할 땐 언제고 내게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헛웃음이 나며, 농담으로라도 면박을 줄까 싶어 그를 제대로 바라보려 고개를 들었는데 내 앞자리에 노트북이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나는 봤다. 나보다 더 경직되어 긴장감이 온몸을 뒤덮은 그를. 그는 나보다 더 떨고 있었고, 그걸 감추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 몸의 긴장이 눈 녹듯 사라진 게 말이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모든 게 다 편해졌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는 노트북을 켜더니 쭈뼛쭈뼛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내게 ppt화면을 보여주었다. 박력 있는 모습이었다. 그는 이 ppt로 공모전도 수상한 꽤 능력자였는데 그런 걸 자랑하려고 ppt를 켜는 건가? 한 껏 호응해 주고 칭찬해 주어야지 마음을 먹었다.


첫 화면은 가을 거리에 벤치들이었다. 적당한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는 벤치에는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다. 그는 이걸 이렇게 설명했다. 지금은 빈자리지만 내게 그 빈자리 빈자리마다 좋은 추억을 잔뜩 안겨주고 싶다고 말이다. 또 하나의 의미를 덧붙였다. 내 옆에 빈자리를 자기가 채워줘도 되냐고 말이다. 사귀는 와중에 또다시 그날 난 그에게 고백을 받았다. 그다음 화면부터는 이상하게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때 그는 학업에 지쳐 한창 바쁠 때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신의를 얻기 위해 이걸 만들었다고 했다. 내가 아직 자신을 조금은 어려워하고, 마음을 다 내어놓지 못하는 걸 알고 한 깜짝 이벤트였다. 나와 더 친해지고 싶어서, 나와 더 오래 함께 하고 싶어서 했던 이벤트였다. 는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전까지 학교에서 과제를 발표하기 위해 만드는 ppt 외에는 ppt의 용도를 떠올려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신랑이 만들어 온 그 프레젠테이션을 듣고 보는 순간, ppt가 이렇게 살가울 수 있구나, 반가울 수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사람의 마음을 담는데 ppt가 제격이란 생각까지 했으니 말이다.


신랑은 그때 한 번으로 멈추질 않았다. 그의 재능을 그렇게 가만히 썩히지 않았다. 그는 내 생일이 되면 사진과 영상을 편집해서 자신의 편지를 음악과 함께 영상에 담았고, 아이의 돌잔치에서까지 그의 재능이 빛이 났다. 내가 아이를 낳고 힘들어하는 모습부터 양가 부모님들의 어릴 적 모습까지 가득 담긴 감동적인 영상이 돌잔치에 온 모든 분들 앞에서 틀어졌으니 말이다.


나는 지금도 그 영상들을 보물처럼 간직한다. 그걸 만들기 위해 사진을 모으고, 편집하고 했을 그의 모습이 너무 아까워서 자주 보지도 못한다. 그리고 주책맞게도 볼 때마다 울컥해서 몇 번을 울었던지 모르겠다. 변하지 않는 그의 모습이 고마워서 눈물이 났던 걸까. 변함없이 날 아껴주는 그의 마음이 따뜻해서 눈물이 났던 걸까. 그가 처음 내게 내밀었던 ppt속 빈 벤치는 이제 더는 올릴 수도 없을 만큼 아주 꽉꽉 채워져 있다.


그와 함께하는 매일매일이 다 소중하다. 그와 함께 하는 시간에는 지금 시간이 멈추어 버려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 만큼 행복하다. 그가 내 삶에 들어와 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그는 알까. 그는 지금도 누구의 엄마가 아닌 내 이름을 불러준다. 나는 그로 인해 영원의 시간을 사는 것 같다. 몸도, 마음도 늙지 않고, 아프지 않고 행복하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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