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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끄루쓰 Jun 02. 2022

회사원 김z의 하루

커피머신님, 대답 좀.

맛있는 아바라는 곧 복지!

'다 먹고살려고 일하는 것'이라는 말은 단언컨대 그 누구도 다신 고안해내기 어려운 명언 중 명언이다. 출근하는 딱 그 시점부터 점심시간만 기다리고 있으니까. 내가 원래 이렇게 식탐이 강한 사람이었나. 애석하게도 11시 58분부터 내 관심은 이미 업무와 칼로 무 베듯 분리되어 있다. 사실 점심 메뉴를 고르는 것은 매일매일 막내에게 주어지는 난제다. 난제. 그럼에도 어쨌든 합법적으로 일에서 잠시 벗어나 내 식욕을 충족할 수 있는 시간이 도래했다는 사실은 나에게 소소한 감격을 선사하곤 한다.


정신없이 점심을 먹고, 멍 좀 때리다가 이제 다시 마음을 잡았다. 밥값 해야지.

오늘 꼭 보고서를 끝내고 말 것이다. 보고서에 통계값을 수두룩하게 넣어오란다. 통계를 보고, 숫자도 보고 열심히 짱구를 굴린다. 이 값은 써먹을 만한가.


해답이 나오지 않을 때는 꽤 용량이 큰 텀블러를 한 손에 꼭 쥐어들고 커피를 타 온다. 우리에게 커피란 사치품이라기보다는 생명수니까. 우리 사무실에서 커피머신은 가공할 만한 존재감을 자랑한다. 답이 안 나올 때 커피머신 앞으로 찾아가면 마치 해답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다들 답 안 나오는 업무에 머리가 아파질 때면 커피머신 버튼을 누르러 간다. 나도 마찬가지고. 지금이 바로 그 때다. 노오란 강아지 캐릭터 얼굴이 정중앙에 박힌 텀블러를 한 손으로 잡아챈다. 어서 여기에 카페인을 가득 채워올 테다. 간 김에 커피머신님이랑 상담도 좀 하고.


삐빅- 탁

버튼을 누르자 머신 안에서 경쾌하게 캡슐 터지는 소리가 울린다. 커피머신님이 활동을 시작하는 순간.


커피머신님. 저는 앞으로 뭘 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요. 지금 분명 나는 보고서 하나를 끝내기 위해 며칠 째 고군분투 중이지만 마음속 한켠의 자아는 언제나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있다.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머릿속에서 자동적인 멀티태스킹이 이루어지고 있는 셈인데, 이 멀티태스킹 스위치를 꺼버리는 순간 내 인생도 함께 off 될 것 같은 불안감이 든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결국 자발적으로 내 정신적인 에너지를 분산시키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고 분산된 에너지가 아깝다는 건 아니다. 모든 에너지를 업무에 쓰는 것도 어떤 면에선 많이 불안하니까.


언제나 그렇듯 커피머신님은 아무 말이 없다.

그저 인자한 몸짓으로 나에게 신선한 카페인을 선사할 뿐. 나는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는 어차피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는, 점심메뉴 고르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난제 중 난제인걸. 이제 막 제조를 끝내고 시원하게 입 안을 헹구는 커피머신을 멍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가끔씩은 아주 가끔씩은 멀티태스킹과 전혀 상관없는 당신의 삶이,  X라는 버튼이 눌렸을 때 곧장 Y를 뱉어내면 모든 임무가 완수되는 삶이 부러워요.


마음의 소리가 들렸는지 커피머신은 나에게 말을 거는 듯하다. 커피머신의 평평한 배 위에서 내 텀블러는 진동한다.


-일단 마셔. 정신이나 차리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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