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일 살아있는 말과 글
스타일(style) : 1. 복식이나 모양 2. 일정한 방식 3. (문학 작품에서) 작가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형식이나 구성의 특질 (표준국어대사전)
말 잘하기의 핵심은 STYLE입니다. ‘스타일이 있다. 스타일이 멋있다.’고 할 때 바로 그 스타일입니다. ‘스타일 난다’라는 브랜드도 있습니다. '스타일이 좋다. 스타일이 어때? 스타일 별로인데' 등 스타일이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죠. 이때 스타일은 도대체 뭘 의미할까요?
사람들은 저마다 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홍길동을 홍길동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름은 사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름을 말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홍길동의 ‘홍길동다움’이 바로 개성이자 본질입니다. 그 사람을 결정짓는 것은 외모나 생김새만큼이나 다양한 특징들이 있죠. 말이나 목소리가 떠오를 수도 있고 외모가 먼저 연상될 수도 있습니다. 흔히 스타일이라고 합니다. 그 사람 스타일이 참 괜찮다고 한다면 이 스타일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영어 ‘style’은 참 재미있는 단어입니다. 어원을 찾으니 14세기 초기의 단어 ‘stile’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글 쓰는 도구인 펜을 의미하기도 하고, 저자의 표현 방식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작가 가운데 스타일을 제대로 분석한 두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원로 학자이자 작가, 우리말의 마술사인 이어령 선생과 로마와 이탈리아와 관련된 저술과 책으로 유명한 작가 시오노나나미입니다.
이어령 선생은 ‘멋’과 ‘스타일’에 대해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멋있는 사람을 보면 '스타일이 멋지다'라고 얘기입니다. 하지만 의미는 정반대라는 겁니다. 영어 단어인 스타일(style)은 어원의 의미대로 날카로운 것으로 꾹꾹 눌러쓰는 것처럼 격식화이고 일정한 법칙, 특정한 양식과 질서를 의미합니다. 반면, 멋은 일정한 격식, 특정한 경향, 일반적인 질서와 규칙을 깨뜨리는 것을 말합니다. 멋있는 사람은 남들과 같은 옷을 입거나 따라가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결국 멋있는 사람은 스타일을 갖추지 않고, 스타일을 따라가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 이어령 선생의 정의입니다. 무심코 쓰는 우리말에 허를 찌르는 분석입니다.
다음은 시오노나나미입니다. 작가는 ‘스타일’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그리스 태생의 작가가 쓴 스타일 정의를 인용했는데요. “누구도 모르지만 누가 봐도 그런 줄 아는 것이 스타일”이라고 얘기합니다.(시오노나나미 '남자들에게', 2010, 한길사) 여기에 더해 시오노나나미는 그 사람의 배경이나 도덕성, 상식에서 자유로운 인간적이고 멋있는 사람을 스타일이 있다고 정의합니다. 이 정의도 재미있습니다. 그 사람의 배경을 보면 대충 이런 사람이겠지라고 생각되는 예상을 깨는 것을 스타일로 봤습니다.
두 작가 모두 스타일을 뭔가를 깨는 것으로 정의했습니다. 다만, 한 사람은 스타일을 갖추지 않을 때 멋이 나온다고 했고, 한 사람은 스타일이 있을 때 멋이 나온다고 본 것이죠. 저는 말하고 글쓰기에서 스타일이 있는 경우를 이렇게 봅니다.
먼저 짧습니다. 말 잘하는 사람의 문장은 간결하고 힘이 있습니다. 전하려는 메시지가 간결하다는 것은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그만큼 더 커집니다. 내용이 단순합니다. 단순하기는 쉽습니다. 짧고 간결하면 됩니다. 중언부언하지 않습니다. 말하기가 어려울 때는 짧게 말하면 됩니다. 여기서 짧음은 말의 내용의 짧음이 아니라 말을 시작과 맺음을 반복해 끊어가는 문장의 짦음입니다. 그럴 때 듣는 사람은 이해하기가 쉬워집니다.
톤(tone)은 말 그대로 어조나 말투를 의미합니다. 노래가 멜로디와 리듬이 있는 것처럼 말을 할 때도 강약이 중요합니다. 요즘에는 톤 앤 매너(tone and manner)라는 말도 많이 씁니다. 직역하면 어조와 태도라고 볼 수 있는데, 뭔가를 만들어낼 때 중시합니다. 분위기를 구성하는 모든 게 나타내려는 주제에 맞게 일관돼야 한다는 것이죠. 브랜드나 디자인 전반에 두루 쓰입니다. 콘텐츠를 제작할 때도 톤 앤 매너가 중요합니다. 가령 유튜브 동영상을 제작할 때는 동영상 전체를 한 컷에 보여주는 제목인 썸네일 화면이 중요한데요, 썸네일을 만들 때도 화면과 자막은 물론 앞으로 보여줄 동영상과의 톤 앤 매너가 전체 분위기를 좌우합니다.
말을 할 때 톤 앤 매너는 그 사람을 기억하게 만드는 정체성입니다. 잘 들리는 말은 리듬이 있습니다. 리듬은 내용의 반복과 정리로 드러납니다. 단락은 첫째, 둘째, 셋째 등으로 끊어지고 중요한 내용은 반복됩니다. 힘을 주어야 할 때 힘을 주고, 나머지는 물 흐르듯이 흘러갑니다. 타인들은 상대방의 말을 다 기억하지 못합니다. 중간 내용은 흘려버리기 쉽습니다. 톤의 변화를 통해 이 부분은 흘리지 말고 잘 들으라고 상대방에게 알려줘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하는 말과 개인적인 일기의 차이점은 끊임없이 듣는 사람(you)을 항상 생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글이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써진다면 말은 좀 더 세분화되고 구체적인 청중이 있습니다. 듣는 대상을 명확하게 할 때 말은 더욱 설득력이 있게 됩니다. 20~30대를 대상으로 한 말과 50~60대를 대상으로 한 말이 같을 수는 없습니다.
말을 듣는 대상이 중요한 이유는 상대방이 내 말을 그럴듯하게 느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목이 그럴듯해야 하고 내용이 그럴듯해야 합니다. 그럴듯함은 영어로 plausibility입니다. 상대방이 내 말을 믿는다는 얘기입니다. 실제 사실 여부는 그다음입니다. 상대방이 내 말을 믿을 수 있게 하는 것은 진실만을 얘기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듣는 사림에게 내 얘기 같아야 하고, 내 이웃의 얘기처럼 느껴져야 합니다. 가령 기자들은 뉴스를 전달할 때 사례를 찾기 위해 고민합니다. 많은 뉴스가 “직장인 김 모 씨는, 주부 이모 씨는, 대학생 박모 씨는, 식당을 운영하는 최모 씨는” 등으로 시작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쇼호스트들이 가족이나 주변 지인들의 사례를 인용하는 것은 그만큼 말을 듣는 시청자(You)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타일이 있는 말과 글은 살아 숨쉽니다. 생동감이 있습니다. 생방송이라고 해서 모두 살아있는 말과 글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지금 내 앞에서 떠들고 있는데 잘 안 들릴 때가 있습니다. 분명 쓴 지 얼마 되지 않은 글인데 수십~수백 년 전의 고전만 못한 글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살아있는 말과 글은 그걸 보고 듣는 사람에게 시기와 맥락이 통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의 얘기를 일화와 비유를 곁들여 스토리텔링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반짝 뜨고 이내 사라지는 베스트셀러보다는 스테디셀러가 훨씬 어렵습니다. 스테디셀러의 가장 최상단에 있다고 볼 수 있는 고전은 현재까지 살아 숨 쉬는 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유행을 넘어, 세대를 연결하고, 동시대인들에게 두루 공감대를 얻기 위해서는 일단 말과 글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사라진 것들과 살아남은 것들의 차이는 의외로 간단한 것에 있습니다.
사실 표현력은 부수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명문장과 명연설은 미사여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담백함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독창성은 새로운 법칙이나 말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의외로 익숙한 것에서 두드러집니다.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을 다르게 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언제 가장 주의를 기울일까요? 독창적인 것, 즉 새로운 것을 접할 때입니다. 창작 활동을 할 때도 유명한 '7대 3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7은 익숙한 것이고, 3은 새로운 것입니다. 제가 잊지 않으려고 하는 일종의 황금률입니다. 게임을 만들 때도 시나리오를 쓸 때도 이와 같은 원칙은 같이 적용된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새롭다’라고 느낄 때는 보편적인 것 7에 참신함 3을 더할 때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익숙한 것이 절반 이상이 돼야 하고 나머지 부분에 익숙하지 않은 참신한 것이 자리 잡아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글을 쓸 때와 말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아는 익숙한 내용만 10을 얘기한다면 진부합니다. 반면, 새로운 것만을 10을 얘기한다면 이상하고 생소한 얘기가 됩니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방송 콘텐츠라면 채널이 돌아가고, 강연이라면 청중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게 됩니다.
과거 우리 선조들도 이런 문제를 이미 얘기했습니다. 조선시대 후기 글쓰기 천재들인 박지원, 이덕무의 글에도 7대 3의 법칙을 두고 고민하고 논쟁한 흔적이 그대로 나옵니다. 이덕무의 '의고와 창신' 박지원의 '법고창신' 조선의 임금 정조의 '문체반정' 기록과 얘기를 보면 감탄사가 나옵니다. 오늘날 지금 이 순간의 말과 글 생활에 대입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수백 년 전 명문장가의 문체와 말투는 분명 오늘날과 다르지만 그 근본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말하기, 글쓰기 어벤저스의 고민은 그렇게 나오게 됐습니다.
그렇다면 말하기, 글쓰기에서 스타일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릴 수 있을까요?